올해 아세안(동남아국가연합) 의장국인 인도네시아는 최근 적극적 외교 행보를 보이고 있다. 동남아 지역으로 범위를 좁혀보면 먼저 군사정부 통치체제의 미얀마 사태 해결에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2021년 2월 군사 쿠데타로 군정이 이어지고 있는 미얀마에서 군정 종식 없이는 아세안의 존재감 손상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또다른 관심 사안은 동티모르(정식 국명, 티모르레스테)의 아세안 가입 여부이다. 동티모르는 2002년 인도네시아에서 독립한 신생국으로, 2011년부터 아세안 가입에 노력하고 있다. 가입이 이뤄지면 동티모르는 아세안 11번째 회원국이 된다.
2022년 아세안 정상회의 “동티모르 가입 원칙적 승인”
미얀마 사태 해결과 동티모르 아세안 가입은 최근 아세안의 핵심 의제로 꼽히고 있다. 지난해 11월 캄보디아 프놈펜에서 열린 아세안 정상회의에서 회원국들은 동티모르의 아세안 가입을 원칙적으로 승인했다. 동티모르에 옵저버 지위를 부여해 정상회의 전체회의를 포함해 아세안의 모든 회의 참석을 허용한 것이다. 지난 2월 초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모인 아세안 외교장관들도 이 같은 내용에 합의했다. 같은 달 13일엔 인도네시아를 방문한 타우르 마탄 루악 동티모르 총리가 조코 위도도(조코위) 대통령을 만나 자국의 아세안 가입 노력에 힘을 보태달라고 재요청했다.
미얀마와 동티모르 사안에는 올해 인도네시아가 다른 여느 아세안 회원국에 비해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물론 미얀마 사태 해결에 대해서는 민주적 지도자 이미지를 지니고 있는 안와르 이브라힘 말레이시아 총리 등 일부 정상도 강력하게 지지의사를 표명하고 있다.
동티모르의 아세안 가입 여부는 미얀마 사태 해결을 향한 노력과는 또 다른 문제이다. 동티모르는 인구 134만 명 남짓의 소국이다. 동티모르는 한·일월드컵이 개최된 2002년 독립한 21세기 최초 신생국이다. 아세안에 라오스와 브루나이 등 소국이 회원국으로 가입해 있다고 하지만, 두 나라의 위상은 동티모르는 차원이 다른 나라들이다. 가령 라오스는 면적만 따지면 영국와 비슷한 나라다. 인도네시아가 보여주고 있는 적극적인 행보는 동티모르가 독립 이전 자국의 지배를 받았다는 점에서 더욱 주목을 받는다.
조코위 인도네시아 대통령 내치 바탕으로 한 외교행보
인도네시아가 동티모르의 아세안 가입을 적극 지지하고 돕는 이유는 무엇일까. 인도네시아는 1975년 포르투갈이 동티모르 식민지배를 끝내고 철수할 때 관할권을 내세우며 군사적 합병을 감행했다. 분리독립을 원하는 동티모르 주민들을 향해 유혈 진압도 주저하지 않았다. 1990년대 말 국제사회에 조성된 동티모르 분리 독립 지지 분위기도 인도네시아를 강타한 외환위기와 장기독재자였던 수하르토의 실각이라는 환경의 영향이 컸다. 동티모르 독립 당시엔 인도네시아 정부의 적극적인 의지는 별로 없었다는 이야기다. 한·일 관계나 여타의 국제관계를 고려했을 때 인도네시아와 동티모르 사이엔 찬바람이 불어도 전혀 이상할 게 없는 상황이다.
그런데 분위기 바뀌었다. 변화는 지속적이었지만, 최근 급변의 중심엔 조코위 인도네시아 대통령의 존재와 인도네시아·동티모르 양국 정부의 이해일치가 크게 작용했다는 게 국제정치 분석가 패트릭 듀퐁의 시각이다. 최근 외교전문매체 디플로맷에 실린 듀퐁의 분석에 따르면 내년까지 재임 10년 임기를 완료하는 조코위 대통령은 경제개혁과 수도이전 등 굵직한 국내 정책으로 높은 지지도를 기록하고 있다. 전임자인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 전 대통령이 정상외교 등을 통한 외치에 두각을 나타낸 것과는 달리, 조코위 대통령은 내치에 집중했던 것이다.
국내 정치 부문의 성과를 바탕으로 한 높은 지지율 속에 조코위 대통령의 시선이 이제는 외교 사안으로 향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특정국과의 양자관계는 물론 굵직한 국제대회를 치르면서 발언권을 높이고, 우크라이나전쟁 등을 두고도 다자외교를 펼쳐왔다. 인도네시아의 국제사회의 발언권과 위상도 그만큼 높아졌다. 동티모르의 아세안 가입 추진은 인도네시아라는 국가 차원은 물론 조코위 대통령에게도 의미가 다는 이야기다.
사과에 적극적인 조코위…역내 중국·호주 영향력 약화 노려
아세안 가입이 동티모르에 대한 외교지원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은 아니다. 동티모르가 아세안에 가입하면 인접지역에 대한 다른 강대국의 영향력을 줄일 수 있다는 계산도 했음직하다. 각종 통계에 따르면 동티모르에 대한 투자에는 중국이 적극적이다. 중국은 독립한 동티모르와 처음 수교한 나라이기도 하다. 이외에도 동티모르와 파푸아뉴기니 등에 대한 관심이 높은 호주를 견제한다는 의미도 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미국이 쿠바의 존재에 부담감을 느껴왔듯이, 인도네시아는 동티모르가 ‘아시아·인도네시아의 쿠바’가 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양국의 신뢰관계 증진은 사과에 적극적이었던 인도네시아의 노력 덕분에 가능했다. 조코위 대통령은 지난 1월 그동안 아체주 등의 분리분립 운동에 대해 정부와 군대가 저지른 인권 유린 행위에 대해 공식 사과했다. 그는 자신의 집권 이전에 발생한 11건의 사건을 하나씩 언급하며 정부의 잘못을 시인했다. 이는 수하르토 실각 이후 처음 인권문제에 대해 사죄했던 압두라만 와히드 전 대통령에 이은 현직 대통령으로는 2번째 사과이다. 조코위 대통령이 거론한 11개의 학살 대상엔 동티모르도 포함됐다. 인도네시아와 동티모르는 지난 2월 정상회담에서도 아세안 가입에 대한 공감대 확인뿐만 아니라 금융, 에너지, 통신, 기술 분야 등에서 협력을 강화하기로 했다. 표현이 협력이지, 인도네시아의 적극적인 지원의사가 확인됐다고 보는 게 타당할 것이다.
인도네시아의 퇴각은 동티모르에 독립국 지위 부여라는 긍정적 평가 못지않게 치안 불안정 등 여러 문제에도 노출되게 했다. 인도네시아는 동티모르 안정화 조치에 적극적이었다. 2008년 진실·우호위원회를 출범시킨 것도 이런 노력의 일환이었다. 이런 노력을 바탕으로 양국은 상대국을 향해 선린우호국으로 표현하곤 한다. 조코위 대통령은 아예 동티모를 아예 형제국으로 호칭했다.
동티모르의 아세안 가입 노력은 2011년부터 지속적으로 이뤄져 왔다. 처음 의사가 타진될 당시에도 인도네시아가 그해 아세안 의장국이었다. 주제 라모스 오르타 동티모르 대통령은 그동안 자국민을 향해 아세안 가입 노력을 간절하게 설명하기도 했다. 오르타 대통령은 지난해 8월 언론 인터뷰에서는 “천국의 문보다 아세안의 문을 두드리는 게 더 어렵다”며 기존 회원국들에 불만을 표출하기도 했다.
아세안은 그동안 여러 조사를 통해 동티모르의 가입을 결정하지 못했다. 아세안의 일부 회원국들은 경제적 규모와 수준 등 여러 이유를 들며 동티모르의 가입에 부정적인 입장을 개진했다. 동티모르의 아세안 회원국으로서 의무 역량 부족, 중국에 대한 높은 경제 의존도, 아세안 차원의 경제 발전에 악재로 작용할 가능성 등이 우려사안으로 지목됐다. 특히 중국이 동티모르의 물류·유통, 주요 인프라 사업을 점유하며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어 다른 회원국들의 우려가 큰 것으로 보인다.
한국과는 우호 관계…독립 당시부터 역할
동티모르와 한국의 관계도 좋다. 한국은 동티모르의 독립을 적극 지원했다. 독립 이전인 1999년 9월 뉴질랜드에서 개최된 아시아태평양경제렵력체(APEC·에이펙) 정상회의에서 당시 김대중 대통령은 동티모르에 대한 국제사회의 지원을 촉구했다. 이후 4년 동안 동티모르 독립지원을 위한 평화유지군(PKO)으로 상록수부대 군인 3250명을 파병했다. 1999년 8월 동티모르 독립 여부를 묻는 투표와 2001년 8월 제헌의회 선거에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손봉숙 당시 위원이 유엔(UN) 선거관리위원회 일원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오르타 대통령은 지난해 5월 선거에서 다시 당선됐다. 국내 외교가에서는 그를 지한파로 평가하고 있다. 노벨평화상 수상자기이도 한 오르타 대통령은 2007년 2대 대통령을 지냈던 인물이다. 2020년 2월 평창평화포럼에 참석해 기조연설자로 나서는 등 그동안 10차례 방한했다. 한국을 동티모르 경제발전 등의 몰모델로 삼고 있다고 전해진다.
한국 정부는 동티모르의 아세안 가입 여부에 대한 아세안의 원칙적 승인 방침을 적극 지지하고 있다. 동티모르의 아세안 정식 회원국 지위 획득을 위한 노력을 적극 지원한다는 입장도 강조하고 있다. 우리 정부는 이같은 입장을 최근 파견한 외교장관 특사단을 통해서도 동티모르 정부에 재확인했다. 특사단에는 김창범 전 주인도네시아 대사와 최경희 서울대학교 아시아연구소 교수 등이 포함됐다. 김 전 대사는 “오르타 대통령을 예방하고 한국의 양국 협력 관계 강화의지를 전달했다”며 “우리 정부의 인·태 전략, 한·아세안연대구상(KASI) 등도 설명했다”고 밝혔다. 그는 6월 초 개최예정인 ‘제주평화포럼’ 개막식에 오르타 대통령이 참석하기를 원한다는 입장을 개진했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