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출판 ‘기울어진 운동장’… 작가는 힘이 없다

‘검정 고무신’ 비극 부른 불공정 계약 실태

계약금만 주고 저작권 전체 양도 강요
애니·드라마 등 히트해도 원작자 ‘빈손’
2차 사업, 작가와 상의·고지조차 안 해
소설가와 갈등… ‘아몬드’ 절판 사태도

웹툰은 플랫폼이 채색 자회사까지 둬
시장 독과점… ‘을’ 작가 권리 주장 못해
정부 “표준계약서 정비”… 구속력 없어
“협회 조직화… 작가들 협상력 높여줘야”

“거대 플랫폼 회사가 제작사, 채색회사 등을 자회사로 소유하고 있습니다. 사실상 시장을 독과점 하고 있는데 작가 혼자 어떻게 싸웁니까.” (웹툰업계 관계자)

 

인기 만화 ‘검정고무신’의 원작자 이우영 작가가 지난 11일 세상을 등지면서 오랫동안 외면당해온 창작자들의 저작권 보호 문제가 수면 위로 올라왔다. 작품 원작자가 자신이 만든 캐릭터를 마음대로 쓸 수 없고, 그 캐릭터를 활용한 2차 저작물이 만들어졌는지조차 모르는 경우가 허다하다. 작품이 흥행해 어마어마한 부가가치를 창출해도 작가는 여전히 가난한 이유다.

 

국내 웹툰은 해외에서도 인기를 끌어 해마다 40%씩 고속 성장하며 연 1조5000억원 규모로 커졌지만, 웹툰작가들의 저작권 및 노동 현실은 여전히 후진적이다. 웹툰업계는 지난 8년간 저작권법 개정 운동을 펼쳤지만, 정부와 국회는 비극적인 사건이 터지고 나서야 부랴부랴 대책 마련에 나섰다.

1992년부터 연재돼 인기를 끈 고 이우영 작가 ‘검정고무신’. KBS2 제공

◆기울어진 운동장, 사실상 저작권 포기 강요

이 작가를 수년간 괴롭혀온 저작권 분쟁 소송의 불씨는 매절계약이었다. 창작자가 출판사나 제작사(CP)로부터 일정 금액만 받고 저작권 전체를 양도하는 것이다. 계약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고 작품의 흥행 여부를 예측할 수 없는 상태에서 제작자 앞에 ‘을’이 될 수밖에 없는 작가들은 무기력하게 저작권을 내준다. 2020년 백희나 작가 ‘구름빵’ 사태도 매절계약 후 출판사가 애니메이션 등 2차 저작권을 임의로 처리하고 막대한 수입을 독점하면서 법적 분쟁으로 이어졌다.



장철영 웹툰협회 자문변호사는 “계약서에 ‘포괄적 위임’ 등 다양한 표현을 써서 작가들에게 2차 저작물에 대한 권한을 포기시킨다”면서 “법률 조언을 해줘도 막상 협상테이블에서 작가들은 힘이 없다. 회당 원고료를 60만원에서 70만원으로 올리는 수준에 그친다”고 말했다.

문제는 2차 저작물 사업권을 위임하면서 원작자들이 제대로 대가를 받지 못할 뿐 아니라 위임 기한을 명시하지 않아 CP가 ‘영구 귀속’을 주장한다는 점이다. ‘계약 종료일 일주일 전까지 이의를 제기하지 않으면 자동 갱신된다’ 식의 항목만 슬쩍 끼워넣는 수준이다. 이 작가도 저작권을 양도하면서 적정한 대가를 받지 못했고, 위임 기한도 정하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밀리언셀러 소설 ‘아몬드’는 작가와 출판사 간 저작권 분쟁으로 책이 절판됐다.

2차 사업권을 가진 CP가 원작을 토대로 애니메이션, 드라마, 연극, 영화 등을 만들어도 작가와 미리 상의하거나 고지하지 않는 경우도 허다하다. 이우영작가사건대책위원회에 따르면 ‘검정고무신’도 15년간 극장판 애니메이션 제작을 비롯해 77개 사업을 벌이고 문화체육관광부 주최 콘텐츠 대상까지 받았지만, 이 작가는 동의는커녕 통지조차 제대로 받지 못했다. 100만부 이상 판매된 소설 ‘아몬드’ 역시 출판사가 지난해 12월 4번째 연극을 올리기 4일 전에야 손원평 작가가 이를 알게 돼 절판 사태에 이르렀다.

네이버, 카카오엔터 등 대형 플랫폼사들이 경쟁적으로 몸집을 키우는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작가들이 저작권을 고집하거나 협상력을 갖기란 쉽지 않다.

(사)웹툰협회 권창호 사무국장은 “영화의 경우 유통과 제작이 철저하게 분리됐는데, 웹툰은 경계가 없다”며 “시장이 커지면서 원천 지식재산권(IP) 확보라는 명분으로 플랫폼 회사들이 웹툰·웹소설 CP뿐 아니라 채색회사 등에도 투자해 자회사로 소유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예컨대 자사 플랫폼에 올라온 작품 외에는 채색을 못 하게 하거나, 채색 등 일부 작업에 참여하며 저작권 공동소유를 주장하는 것”이라며 “그러니 플랫폼 회사들은 투자받으려고 너도 나도 CP를 차리는데, 그런 CP가 작가 편을 들겠나”라고 반문했다.

플랫폼, CP, 작가 등으로 구분되는 분업 역시 작가들의 저작권을 위협하고 작가 수입이 줄어들게 하는 요인으로 지목된다. 플랫폼이 CP와 작가 등 창작자에게 돌려주는 정산율은 50∼70%라고 한다.

백희나 작가의 ‘구름빵’은 매절계약 때문에 수익을 출판사가 독점했다. 교보문고 제공

◆구속력 없는 표준계약서의 한계

문체부는 뒤늦게 ‘제2의 검정고무신 사태’가 일어나지 않도록 만화 분야 표준계약서를 재정비하겠다고 밝혔다. 2차 저작물 작성권 내용을 구체화하고, 제3자 계약 시 사전동의 의무 규정을 포함해 창작자 저작권 보호 장치를 마련하는 내용이 핵심이다. 하지만 표준계약서는 법적 구속력이 없는 데다, ‘관행’이라는 이름의 불공정 계약 조항이 많다.

계약 해지뿐 아니라 소송이나 표절 시비 등에 휘말릴 경우에도 그 책임과 부담은 오롯이 작가에게 전가되는 경우가 많다. 웹툰업계 관계자는 “최근 사이비 교주가 나오는 웹툰을 그린 작가가 한 목사로부터 자신을 부정적으로 묘사한 것 같다며 소송을 당했는데 플랫폼사는 뒤로 빠지고 (작가 혼자) 알아서 하라고 했다”면서 “겁에 질린 작가는 거액을 물어주게 될까 봐 스트레스에 시달리다가 연재를 중단했다”고 전했다. CP 측이 비밀유지 조항을 남발해, 법적 검토를 위한 변호사 자문은 가능한데도 상담조차 꺼리는 작가들도 적지 않다.

표준계약서를 정비하고 저작권법을 개정한다 해도 사인 간 계약에 정부가 일일이 개입할 순 없다. 장 변호사는 “갑의 칼을 무디게만 할 게 아니라 을에게 방패를 쥐여줘야 한다”면서 “규제로 잡을 수 없는 불공정 계약을 원천적으로 막기 위해서는 해외의 길드처럼 조직화한 협회가 보호와 제재를 통해 작가들의 협상력을 높여줘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