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 스포츠에서 챔피언 결정전을 3년 연속 우승을 차지하면 ‘왕조’라는 칭호를 부여한다. 3년간은 독보적인 성적으로 우승을 독점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만 있는 게 아니라 영어권 국가에서도 특정 구단이 3연패를 차지하면 ‘Dynasty’라는 표현으로 경외심을 표현하곤 한다.
2005년 출범한 V리그는 여자부에선 특정 구단의 챔프전 3연패는 한 번도 나오지 않았고, 남자부에서는 삼성화재만이 왕조라는 표현의 특권을 누렸다. 신치용 감독이 이끌던 삼성화재는 2007~2008시즌부터 2013~2014시즌까지 무려 7년 연속 챔프전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정규리그 1위 자리는 2008~2009시즌(현대캐피탈), 2010~2011시즌(대한항공)에 빼앗기긴 했지만, 챔프전에만 가면 삼성화재 특유의 DNA가 발동되며 상대들을 여지없이 격파했다.
‘삼성화재 왕조’는 2014~2015시즌에도 정규리그 1위를 차지했지만, 챔피언 결정전에서 창단 2년차의 OK저축은행(현 OK금융그룹)과 챔프전에서 충격의 3전 전패로 무릎을 꿇으며 막을 내렸다. 이후 삼성화재는 챔프전에는 단 한번도 오르지 못하고 있다.
삼성화재 왕조의 몰락 이후 춘추전국시대로 전개되던 V리그 남자부에 두 번째 왕조가 드디어 등장했다. V리그 출범 초반만 해도 삼성화재와 ‘양강’ 구도를 형성했던 현대캐피탈에 밀려 ‘만년 3위’ 이미지가 강했던 대한항공이 그 주인공이다.
대한항공은 3일 천안 유관순체육관에서 열린 2022~20203 V리그 남자부 챔피언 결정전(5전 3승제)에서 첫 두 세트를 내주고도 내리 세 세트를 따내는 ‘리버스 스윕’을 선보이며 3-2(23-25 13-25 25-22 25-17 15-11) 승리를 거뒀다. 1, 2차전에 이어 3차전까지 잡아낸 대한항공은 2020~2021시즌부터 정규리그 1위와 챔프전 우승을 독식하는 ‘통합 3연패’를 이뤄내며 정식으로 ‘대한항공 왕조’의 탄생을 알렸다. 챔프전 우승뿐만 아니라 정규리그 1위까지 3년 연속 이뤄냈다는 것은 단기전뿐만 아니라 장기 레이스에서도 가장 강한 팀으로 군림했다는 의미다.
여기에 대한항공의 V리그 챔프전 첫 우승이었던 2017~2018시즌을 포함하면 최근 열린 5번의 챔프전에서 4차례나 승자가 됐다. 2010년대 후반부터 2020년대 초반의 V리그 남자부는 그야말로 ‘대한항공 전성시대’인 셈이다.
대한항공 왕조 탄생의 원동력은 세터 한선수를 필두로 하는 탄탄한 시스템 덕분이다. 2007~2008 신인 드래프트에서 2라운드 2순위로 대한항공 유니폼을 입은 한선수는 지명 순위에서 알 수 있듯 데뷔 초만 해도 그리 큰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부단한 노력과 피나는 훈련을 통해 2010~2011시즌부터 3년 연속 대한항공을 챔프전에 이끌며 정상급 세터로 올라섰다.
세 시즌 연속 삼성화재에 패퇴한 한선수는 더욱 토스를 갈고닦았고, 나이가 들수록 노련해지는 경기운영과 재기발랄한 토스워크가 합쳐지자 명실상부 현역 최고의 세터로 성장했다. 이후 후배 아웃사이드 히터 정지석-곽승석 콤비와 함께 ‘수석석 트리오’를 결성하면서 한선수의 경기운영 능력과 토스는 절정에 다다랐고, 커리어 초반 삼성화재 왕조의 희생양이 됐던 설움을 딛고 V리그 데뷔 16년 차, 한국 나이로 서른아홉에 대한항공 왕조의 선장이 됐다.
이번 챔프전에서도 한선수는 위기 상황에서도 좀처럼 흔들리지 않는 경기운영과 당일 컨디션이 가장 좋은 공격수에게 토스를 집중하는 ‘효율 배구’로 대한항공의 3전 전승을 이끌었다. 이러한 활약에 힘입어 기자단 투표 결과 31표 중 23표를 받아 74.2%의 득표율로 챔프전 MVP로 선정됐다. 2017~2018시즌에 이어 생애 두 번째 챔프전 MVP다.
한선수는 “3연속 통합우승을 해서 기분좋다”며 “이번 시즌은 상복이 있는 것 같다. 나이가 들수록 한 해, 한 해 더 소중하다”고 말하며 잠시 눈시울을 밝혔다. 은퇴를 고민하고 있다는 한선수는 “조금씩 내려놓으려고 하지만 무게감이 느껴진다. 그래도 버텨야 하니까 마지막까지 버틸 생각이다. 목표는 42살까지 뛰는 건데, 팀원들의 리시브에 달렸다”며 웃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