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강남 납치·살인, 낮잠 잔 암호화폐 법안 탓도 크다

서울 강남 한복판에서 일어난 40대 여성 납치·살인 사건을 수사 중인 경찰이 어제 배후로 거론됐던 가상화폐 업계 관계자 유모 씨를 체포하고 자택을 압수수색했다. 또 범행을 실행한 이경우, 황대한, 연지호 등 핵심 피의자 3명의 사진과 실명 등 신상을 공개했다. 우발범죄가 아닌 배후세력과 다수의 공범, 조력자가 개입한 기획범죄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범행 동기로는 거래소에 상장됐던 가상자산(암호화폐) ‘퓨리에버’ 코인 투자를 둘러싼 금전적 갈등이 거론됐다. 경찰의 미흡한 초동수사로 인명피해를 막지 못한 책임도 물어야 하겠으나 불법·편법이 판을 치는 투기판이 된 암호화폐 시장 문제도 짚고 넘어가야 한다.

퓨리에버 코인은 2020년 11월13일 암호화폐 거래소 코인원에 상장됐다. 2200원대에서 시작한 코인 가격은 한 달가량 뒤인 2020년 12월 21일 1만354원까지 치솟았다. 시세 조작 의심 거래가 빈번해 상장유의 종목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결국 이듬해 3월 코인 가격은 2000원대까지 급락했고, 이 무렵 이번 납치·살인 사건의 연루 인물들이 등장했다. 은원관계가 얽히고설켰을 가능성이 높다.



암호화폐 시장은 한때 하루 42조원이 거래될 만큼 열기가 뜨거웠다. 수백만명에 달하는 투자자의 상당수는 2030세대였다. 시장 과열로 인한 심각한 사회문제가 우려됐음에도 정부는 이들의 눈치를 보느라 규제 법안 마련에 소극적이었다. 2021년 5월 이후 관련 법안이 총 18건이나 발의됐지만 한 건도 국회 문턱을 넘지 못했다. 그 사이 암호화폐 범죄가 난무했다. 블록체인 전문 보안업체 ‘웁살라시큐리티’는 자체 통계 보고서를 통해 2020년 4월부터 올해 2월까지 총 1671건의 암호화폐 범죄 관련 피해 신고를 접수받았다고 했다. 피해액이 4768억 6000만원에 달한다.

이메일 등을 통한 피싱 사이트를 개설하거나 투자 관련 사이트에서 비밀번호를 해킹해가는 수법이 성행했다. 미국에서 발생한 테라·루나 사태 및 에프티엑스(FTX) 거래소 파산 사태의 국내 피해자도 적지 않았다. 몇 명이서 코인을 사고팔며 시장을 마음대로 조작할 수 있었지만 피해를 당하면 법으로 해결할 방법이 전무했던 탓이다. 자본시장법 규제를 받지 않는 무법천지 코인 시장을 더 이상 방치해선 안 된다. 범죄 처벌 및 투자자 보호를 위한 전용 법안 마련이 시급하다. 이번 납치·살인 사건이 던지는 또 다른 교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