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미국 상무부가 발표한 ‘반도체 과학법’(CHIPS and Science Act, 이하 반도체법)의 과도한 보조금 신청요건이 미국에 대규모 투자를 진행 중인 국내 반도체 기업들에 심각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전국경제인연합회 산하 한국경제연구원은 14일 발표한 ‘미국 반도체법 보조금 신청요건의 문제점 및 대응방향’ 보고서에서 미국 반도체법의 4대 독소조항으로 △반도체 시설 접근 허용 △초과이익 공유 △상세한 회계자료 제출 △중국 공장 증설 제한 등을 꼽았다.
◆“기술 유출·수익성 악화 불가피”
보고서는 반도체법의 반도체 시설 접근 허용 요건에 대해 “기술 및 영업 비밀의 유출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반도체법에 따르면 미국 정부는 미국 내 반도체 기업에 보조금을 지급하는 대신 반도체 생산시설에 국방부 등 국가안보기관의 접근을 허용할 것을 요구한다.
초과이익 공유에 대해선 “기업 본연의 목표인 이윤 추구를 제한한다”고 지적했다. 미국은 1억5000만달러 이상의 보조금을 받는 반도체 기업이 예상보다 많은 이익을 얻으면 보조금의 최대 75%를 미국 정부와 공유해야 한다는 요건을 뒀다. 이 경우 투자에 대한 경제성이 하락해 기업의 수익성에도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
보고서는 “반도체 보조금 혜택을 위해 반도체 생산 관련 자료, 원료명, 고객정보 등의 영업 비밀까지 공개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반도체법은 재무자료뿐 아니라 주요 생산 제품, 생산량, 상위 10대 고객, 생산 장비, 원료 등의 자료까지 제출을 요구하고 있다.
중국 공장 증설을 제한하는 ‘가드레일’ 조항은 국내 기업이 보유한 기존 중국 공장의 생산성 및 수익성 악화를 초래할 우려가 제기된다. 가드레일 조항은 10년간 우려 대상국에 투자를 확대하거나 반도체 제조 역량을 확대하지 못하는 규정이다.
삼성전자는 중국 시안에서 낸드플래시, 쑤저우에서 패키징 공장을 운영 중이다. SK하이닉스는 우시에서 D램, 다롄에서 낸드플래시를 생산하고 있다. 중국 시장이 큰 데다 전후공정이 엮여 있는 반도체 공장 특성상 현지 설비를 타국으로 옮기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양국 상호이익 늘리는 쪽으로 협력해야”
한경연은 미 반도체법에 대해 “동맹국인 한국에 불합리한 요건”이라고 못 박았다. 한경연은 “(반도체법 내 독소조항들은) 한국 기업이 미국에 투자를 확대하고 미국은 자국 내 생산시설을 유치하는 것을 방해하는 요건”이라며 “상호주의에 입각한 형평성에 맞는 반도체법 보조금 요건을 마련하여 양국의 상호이익을 도모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한경연은 정부가 지속적인 실무협의를 통해 합리적인 하부 규정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합의된 수치’, ‘프로젝트마다 다를 수 있다’, ‘특정 조건을 제외하고’ 등 보조금 요건에 포함된 정의, 예외, 단서조항 등을 최대한 활용해 국내 기업에 유리한 조건이 반영되도록 세부규정을 협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경연은 세제혜택을 늘려 국내 투자환경을 개선하면 해외로 쏠리는 기업의 투자를 국내로 돌릴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한경연은 “세계 주요국은 법인세, R&D·시설투자 조세감면, 보조금 지급 등을 확대하여 자국에 투자를 유도하고 있다”며 “한국도 R&D 및 시설투자 세액공제율을 인상하는 법률이 국회를 통과하여 경쟁국 수준의 지원 기반을 마련하였으나, 법인세의 경우 1% 인하에 그쳐 OECD 평균인 22%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이규석 한경연 부연구위원은 “미국은 반도체 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반도체법으로 자국 내 반도체 생산기업의 지원을 확대하고 있지만, ‘칩4 동맹’ 등에 따른 한미 협력은 미흡한 실정”이라며 “미·중 패권경쟁이 심화하는 가운데 한국과 미국의 동맹관계가 반도체 투자로 이어져 양국 상호이익이 될 수 있도록 양국의 협력 확대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