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를 뒤흔든 미 국방부 기밀 유출 용의자 잭 테세이라 일병이 지난 13일 전격 체포됐다. 범행 동기와 경위, 공범 여부 등은 수사로 밝혀지겠지만 21세 하급 병사가 1급 국가기밀 300여건을 빼돌리면서 세계 최강을 자랑하는 미국 기밀 취급 시스템의 허술함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관련 기밀들이 대부분이지만, 한국 등 동맹국들에 민감한 정보도 다수 포함돼 있다.
이처럼 국가 안보에 심각한 위해가 될 사안임에도 우리 정부의 외교적 처신은 볼썽사납다. 진위 여부가 파악되기도 전에 ‘해당 문건의 상당수가 위조됐다’고 선을 그었다. 심지어 김태효 국가안보실 1차장은 “동맹국인 미국이 악의를 갖고 도·감청했다는 정황은 없다”고까지 했다. 미국 측 외교 인사조차 “심각하게 보고 있다”는 말을 수차례 한 것과 비교하면 저자세 외교라는 비판이 나올 만하다. 동맹의 입장을 고려하더라도 국가 안보에 위해가 되는 도·감청에 대해 악의가 없다고 면죄부를 주겠다는 건 잘못된 일이다.
용의자가 어떤 의도로 기밀 문서를 빼돌렸는지, 그 과정에서 정보를 가공·조작했는지는 예단할 수 없다. 다만 용의자가 체포되면서 도·감청 여부를 떠나 미 국방부 내부 자료가 유출됐고, 그 문건에 우리 정부에 민감한 사안들이 담겨 있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한국갤럽 여론조사에서 윤석열 대통령 지지율이 27%로 5개월 만에 20%대로 곤두박질쳤다. 국정 리더십마저 흔들리는 상황을 초래한 건 바로 국민에게 신뢰를 주지 못하는 어정쩡한 ‘외교 정책’ 탓도 크다.
아무리 중요한 동맹도 국익보다 우선일 수 없다. 이번 기밀 유출과 연관된 영국·프랑스 등 다른 나라와 달리 우리 정치권과 언론이 유독 민감하게 받아들인다는 대통령실의 생각은 안이하다. 오는 26일 한·미 정상회담에서 미국의 명확한 입장 표명과 재발 방지를 요청하는 게 옳다. 위기가 기회라고 하지 않던가. 이번 사태가 한·미 양국 간 더 높은 수준의 군사 정보 교류 계기가 되면 좋겠다. 이를 위해 윤 대통령이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의 회담에서 도·감청 문제를 미국의 정보 동맹인 ‘파이브아이즈’(미국, 영국, 뉴질랜드, 호주, 캐나다)의 한국 참여를 논의하는 지렛대로 삼는 것이 바람직하다. 파이브아이즈는 영어권 기밀 정보 동맹체이지만, 중국을 견제하려는 미국도 한국이 필요할 것이다. 아울러 취임 1년을 앞두고 대통령실의 개편을 고려 중인 윤 대통령은 잇단 논란에 휩싸인 외교안보 라인 재정비를 서둘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