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구리시에서 접수된 전세사기 피해 규모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는 가운데 이들 일당 소유의 전세주택이 서울과 인천 등 수도권에 900여채가 있어 ‘깡통전세’일 가능성이 제기됐다. 인천 미추홀구 전세사기 사태 파장이 구리에서 재연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있다. 앞서 경기 화성시 동탄과 의정부시에서도 전세사기 피해 사례가 속출한 가운데 경기도 등 지방자치단체 차원의 대책은 실효성이 낮다는 지적이 나온다.
25일 구리경찰서에 따르면 경찰은 지난 2월 전세보증금 미반환 사건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분양대행업자와 공인중개사, 분양대행사 등이 공모해 세입자의 전세보증금으로 다른 주택을 매입하는 ‘깡통전세’ 수법으로 주택 수백 채를 사들인 것을 확인했다. 피해자들이 계약한 주택의 보증금은 다른 주택의 매매 대금으로 지급돼 현재는 보증금 지급이 어려운 상황이다.
이런 형태의 주택은 분양대행업자 고모씨 명의로 된 게 서울과 인천 등에 540채가 넘고, 나머지 관련 인원을 포함하면 940여채가 되는 것으로 잠정 파악됐다. 경찰은 고씨와 분양대행사 관계자 외에 연루된 부동산중개업자 300여명 중 범행에 조직적으로 개입한 중개업자 등 20여명을 입건하고 조만간 구속영장을 신청할 것으로 알려졌다. 계약 기간이 남은 세입자들이 아직 피해 신고를 미루고 있어 조만간 피해 신고가 속출할 가능성이 커 보인다.
고씨 일당은 특히 세입자들을 끌어들이는 데 공인중개사를 대거 동원한 것으로 파악됐다. 법정 수수료율보다 많은 중개비를 받아 뒷돈을 챙긴 공인중개사만 300명이 넘는 걸로 확인됐는데, 경찰은 이 중 거래에 적극 가담한 인원을 추려 고씨와 함께 사기 혐의로 입건했다.
충북에서도 전세사기 수십 건이 적발됐다. 충북경찰청은 지난해 7월부터 최근까지 전세사기 특별단속을 벌여 22건을 적발, 54명을 검거했다고 이날 밝혔다. 허위 보증보험이 28명, 무자본·갭투자 보증금 편취가 5명, 권리관계 허위 고지가 4명, 깡통전세 등 보증금 미반환이 3명, 실소유자 행세가 1명 등 사기 수법이 다양했다고 한다. 이 가운데 9명은 구속 수사 중이다.
이날 경기도 산하 경기주택도시공사(GH)는 전세사기 피해자에게 임대차 시세의 30% 수준으로 긴급 지원주택을 공급한다고 밝혔다. 대상은 경기도 전세피해지원센터로부터 피해 사실을 확인받은 피해자다. 퇴거명령 등으로 주거지원이 필요한 도민이라면 누구나 신청할 수 있다. 공급되는 GH의 매입임대주택 등에선 최장 2년까지 거주할 수 있다.
피해 사례가 끊이지 않으면서 국토교통부와 경기도 등의 특별합동점검이 5월까지 이어진다. 경기도 특별사법경찰(특사경)은 별도로 지역별로 관련 수사에 착수했다. 그러나 제한된 권한과 정보들로 인해 사실상 단속과 예방이 불가능하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현재로선 지방자치단체가 전세사기 피해를 막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특사경을 통한 수사와 정부와의 합동점검뿐이다.
◆살던 집 ‘셀프 경매’ 세입자 급증
최근 집주인이 새로운 세입자를 구하지 못하는 역전세난에 더해 전세사기 피해까지 늘면서 세입자가 직접 살던 집을 경매 신청하는 사례가 급증한 것으로 나타났다.
25일 부동산 경매 전문업체 지지옥션에 따르면, 4월 수도권의 경매 물건 중 세입자가 경매를 신청한 경우는 230건으로 집계됐다. 지난달 139건에 비해 65% 늘어난 수치다.
이달 들어 서울의 세입자 신청 경매 진행 건수는 모두 150건으로 전월(75건) 대비 2배로 뛰었다. 빌라왕 사건이 불거진 지난해 12월(43건)과 비교하면 넉 달 새 3배 넘게 불어난 것이다.
인천에서도 이달 세입자 경매 진행 건수가 28건으로 전월(16건) 대비 75% 늘었다.
수도권 세입자 경매 진행 건수는 2018년 375건에서 지난해 978건으로 매년 증가세다. 올해도 4월 현재 이미 지난해 경매 진행 건수의 절반이 넘는 547건(56%)이 경매에 부쳐진 만큼 연말이 되면 1000건을 훌쩍 넘을 것으로 보인다.
세입자가 경매를 신청한 주택은 전세보증금 변제 문제가 걸려 있는 만큼 요즘 같은 집값 하락기에는 응찰자가 많지 않다. 세입자가 퇴거에 응하지 않아 갈등이 생기기도 하고, 선순위 전세권이 있는 경우 낙찰자가 세입자에게 보증금을 우선 변제해줘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입자가 살던 집을 경매에 넘긴 뒤 직접 낙찰까지 받는 이른바 ‘셀프 낙찰’도 늘어나는 추세다. 서울에서 세입자가 경매 신청 이후 낙찰까지 받은 경우는 2020년 52건, 2021년 66건이었다가 지난해에는 105건으로 급증했다.
이주현 지지옥션 선임연구원은 “세입자 입장에선 내 보증금으로 내 집을 마련하는 것과 같은 결과로 앞으로 보증금보다 집값이 많이 올라야 손해를 보지 않는 셈”이라고 말했다.
국토부는 최근 전세사기 피해자가 살던 주택을 낙찰받더라도 무주택자 자격을 유지해 향후 청약에서 불이익이 없도록 주택공급규칙을 개정했다.
◆‘전세 보증금 우선 변제’법 행안위 통과
전세사기 주택이 경매 또는 공매로 넘어갈 경우 해당 주택에 부과된 지방세보다 임차보증금을 우선적으로 변제하는 내용의 지방세기본법 개정안이 국회 행정안전위원회를 통과했다. 개정안이 본회의까지 통과할 경우 전세 보증금보다 지방세를 우선 변제하는 내용이 법안에 명기된 지 60여년 만에 첫 예외가 탄생하게 된다.
행안위는 25일 전체회의를 열고 지방세기본법 일부개정법률안을 의결했다. 상임위 통과 절차에는 통상 수일이 걸리지만 행안위는 전세사기 사태의 심각성을 고려해 이날 법안심사제1소위원회와 전체회의를 연달아 열고 상임위 절차를 하루 만에 모두 끝냈다. 개정안은 27일 열리는 국회 본회의에서 최종 의결될 전망이다.
이날 통과된 개정안은 지난 1월30일 정의당 심상정 의원·2월13일 더불어민주당 강준현 의원·3월23일 민주당 이형석 의원이 각각 대표 발의한 개정안과 지난 18일 국민의힘 장제원 의원이 대표 발의한 개정안 등 유사한 개정안 네 건을 통합해 만든 대안이었다. 통과된 개정안의 주된 내용은 전세사기 피해 주택이 경매나 공매로 넘어가게 되면 해당 주택에 부과된 지방세보다 세입자의 임차보증금을 우선 변제해주는 것이다. 현행법에는 지방세를 우선 변제하고 남은 돈으로 임차보증금을 돌려주도록 돼 있다.
지방세를 전세권에 우선해 징수하는 내용의 법 규정은 지방세기본법 제정 이전인 1962년 12월 지방세법 31조에 처음 명기됐다. 이후 지방세를 우선 징수하는 법 규정에 예외를 둔 적이 없어 이날 개정안 통과로 관련법이 생긴 지 60여년 만에 처음 예외를 두게 됐다.
국회 국토교통위원회도 28일 전체회의를 열고 전세사기 관련 법안들을 논의하기로 했다. 이번 주 발의 예정인 정부·여당의 특별법과 민주당 조오섭 의원, 정의당 심 의원이 각각 발의한 공공매입 특별법 등을 논의할 예정이다. 공인중개사법 개정안 등 전세사기 예방을 위한 법안들도 논의한다. 국토위는 다음 달 초 법안소위를 열고 해당 법안들을 처리할 계획이다.
정부·여당이 추진 중인 전세사기 피해자 지원을 위한 특별법은 27일 발의될 예정이다.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은 이날 서울 강서구 전세피해지원센터를 방문한 자리에서 기자들과 만나 “아마 내일(26일) 정도면 특별법 발의를 위한 실무 준비를 거의 끝낼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여야는 이르면 다음 달 초 본회의에서 특별법을 처리할 전망이다. 원 장관은 “실무적으로 걸리는 점이 있어 다음 주로 넘어갈 수는 있겠지만 오래 끌지는 않을 것”이라며 “빠르면 이번 주 내에도 (특별법 처리가) 가능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