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팝 관련 행사를 할 수 있는 포맷(형식)이 두 개밖에 없어요. (현지) 팬들이 참여해서 춤을 추거나 노래를 부르는 거. 아니면 한국에서 댄스 강사를 초빙해 K팝 아카데미를 하는 거요.
대중문화는 워낙 (변화) 흐름이 빠른데 현지에서는 정보도 부족하고 저작권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어려워요. (한국) 드라마 축제를 하고 싶었는데 (영상) 저작권이 걸려서 (못했어요).
더 이상 ‘두 유 노 코리아(Do You Know Korea)? 김치? BTS(방탄소년단)?’는 아니에요. 그것에서 벗어나 한 차원 업그레이드돼야 하는데, 아직 한복이나 김치, K팝에만 머물러 있어요. 그다음 단계에서는 무엇을 해야 할지, (문화원이 한국) 문화를 소개한다면 그다음 역할은 무엇인지 컨센서스(합의)와 새로운 개발(개선 방안)이 필요한 단계입니다.
문화·관광·콘텐츠 분야 국책연구기관인 한국문화관광연구원이 지난해 10월 28개국 재외 한국문화원 33곳 근무자 102명을 대상으로 한국 대중문화 콘텐츠의 국가 브랜드 제고 효과와 문화원의 관련 프로그램 운영 현황 등을 온라인 설문조사한 결과 이 같은 답변이 적지 않았다.
우리 대중가요와 드라마, 영화 등 대중문화 콘텐츠가 세계 각국에서 한국에 대한 긍정적 이미지 형성과 한국문화원 방문객 유치에 가장 크게 기여하고 있지만 그 가치와 영향력을 재외 문화원이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해외문화홍보원이 운영하는 재외 문화원은 전 세계에서 한국의 이미지를 드높이고 문화예술을 확산하는 주요 거점이다. 특히, 대중문화 콘텐츠를 중심으로 한 K컬처(한국 문화·한류)의 세계적 영향력과 경쟁력 강화를 내건 윤석열정부가 들어서면서 ‘K컬처 해외 진출 플랫폼’으로서의 역할이 새롭게 부각됐다. 정부가 이달 초 스웨덴 스톡홀름과 오스트리아 빈에 한국문화원을 열어 30개국 35곳으로 늘린 것도 같은 맥락이다. 스웨덴에 한국문화원이 들어선 건 북유럽에서 처음이고, 오스트리아는 서양 클래식의 본고장이다.
그러나 다양한 K컬처 장르 중 세계적 영향력과 경쟁력을 자랑하는 대중문화 콘텐츠가 정작 대부분 재외 문화원에서 뻔하게, 아니면 소홀하게 다뤄지고 있는 실정이다. 대중문화 콘텐츠 관련 전문 인력과 예산 부족, 문화원장별 대중문화에 대한 시각과 역량 차이 등이 주요 원인으로 지목된다.
21일 한국문화관광연구원의 ‘대중문화콘텐츠가 국가브랜드 증진에 미친 영향 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10월 설문조사 당시 33곳 재외 문화원에서 운영한 각종 프로그램을 대중문화, 한국 음식, 한국어, 문화예술, 전통문화 5개 장르로 나누어 프로그램별 수요도·인지도·호감도·체험 후 만족도를 파악한 결과 대중문화 프로그램이 4개 항목(5점 척도 기준) 모두 여유 있게 1위를 차지했다. 큰 인기를 끈 K팝(BTS, 블랙핑크 등)과 드라마(‘오징어 게임’ 등), 영화(‘기생충’ 등)를 통해 한국이라는 나라와 문화의 매력이 자연스럽게 널리 알려진 데 따른 것으로 분석된다.
세계일보가 입수한 해외문화홍보원의 ‘2022년도 국가이미지 조사’ 결과도 마찬가지다. 세계 주요 24개국 1만200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조사에서 ‘한국 국가이미지 긍정 요인’(복수 응답)을 묻는 질문에 K팝과 드라마, 영화 등 ‘현대·대중문화’를 꼽은 응답률이 65.6%로 압도적 1위였다. 이어 △문화유산 45.4% △한국산 제품·브랜드 41.9% △전통문화 32.5% △경제 수준 32.3% △과학기술 20.6% △사회 시스템 12.1% 순이었다. 2018년 첫 조사 때 ‘평소 한국을 가장 많이 접한 분야’로 ‘남북문제 등 안보 분야’를 꼽았던 미국·프랑스·호주의 경우 지난해 조사에서는 현대·대중문화 분야로 바뀌었다.
한국문화관광연구원이 지난해 심층 인터뷰를 한 이탈리아와 인도네시아, 캐나다, 튀르키예, 헝가리 주재 한국문화원 원장들 역시 “K팝 등 대중문화 관련 공연은 한 시간 안에 티켓이 다 마감된다. 홍보하지 않아도 알아서 찾아온다”거나 “현지 넷플릭스에 들어가면 아예 ‘K드라마’ 코너가 따로 생겼다. 굉장히 한국에 호감을 가지고 있고, 한국에 대한 이미지도 좋아졌다”는 등 우리 대중문화 콘텐츠에 대한 해외 관심도와 영향력이 대단하다고 전했다. 이는 역사와 전통·생활문화 등 한국 전반에 대한 외국인의 관심으로 이어지고 결국 한국 관광과 상품시장 확대에도 많은 도움이 된다.
그러나 재외 문화원들이 운영하는 대중문화 프로그램을 보면 대체로 양과 질 모든 측면에서 수준이 낮다는 지적이 많다. 문화원 33곳의 장르별 프로그램 구성 비율과 예산 비율(괄호 안)을 보면 △한국어 27.5%(21.7%) △대중문화 19.7%(23.9%) △문화예술 18.3%(24.4%) △한국 음식 16.7%(14.2%) △전통문화 11.4%(10.8%) △기타 6.4%(5.0%)로 나타났다.
문화원 자체 기획력과 구성력도 빈약해, 현지인들이 참여하는 K팝 노래나 댄스 경연, K팝 아카데미, 영화제가 대부분일 만큼 대중문화 프로그램이 천편일률적인 것도 문제다. 한 재외 문화원 관계자는 “대중문화 트렌드(흐름)에 대한 문화원장의 개인적 지식과 섭외 능력에 따라 프로그램 구성과 질에 많은 차이가 있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대중문화 프로그램은 유명 아이돌 그룹을 초청해 공연하는 것으로 단순화하거나 문화원의 역할이 아니라고 단정하는 문화원장도 일부 있었다.
문화원에 따라 참신한 프로그램을 기획해 운영하려 해도 직접 한국의 기획사와 접촉해 저작권 문제를 해결하는 게 쉽지 않거나 사업 예산을 마련할 길이 없는 것도 걸림돌이다. 유럽의 한 문화원은 올해 예산 부족으로 대외 행사를 축소하고 인력 규모도 줄여야 하는 상황이라고 한다. 이와 관련, 해외문화홍보원 측은 세계일보와 통화에서 “예산은 지난해보다 늘었지만 원화 기준으로 받다 보니 고환율과 고물가에 실질 예산이 줄어든 셈이 돼 재외 문화원은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채지영 한국문화관광연구원 연구위원은 “대중문화 콘텐츠는 한국 국가 브랜드 형성에 지대한 공헌을 했고 외교나 정치가 해결하지 못한 업적을 이뤘는데 평가도 활용도 제대로 못하고 있다”며 “대중문화 콘텐츠를 적절하게 활용할 수 있도록 정부 차원에서 총괄하는 시스템과 중장기 실천 전략 수립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채 연구위원은 또 “재외 문화원에는 대중문화 프로그램 기획·제작에 많은 어려움이 있으므로, 전문가들이 현지 수요와 기대에 맞춰 만든 새롭고 다양한 프로그램을 지원할 필요가 있다”며 “원장들의 관점에 따라 문화원의 활동 목표와 역할 등이 제각각이 되지 않도록 문화원의 정체성과 역할을 확립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