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 170만원+건당 5만원 수당, 교통비·식대 별도, 급여대행.’
30대 주부 A씨가 했던 아르바이트 조건과 내용이다. 그는 지난해 2월쯤 ‘B 급여대행’이라는 이름의 회사에서 일하게 됐다. A씨가 맡게 된 업무는 급여관리 및 지급대행. 사무실에 매일 출근도장을 찍는 일 없이 텔레그램으로 팀장이 지시한 업무만 하면 됐다. 일터에서 상사와 부딪칠 일도 없고, 업무강도는 약한데 급여는 많은, 그야말로 ‘꿀알바’였다. 그러나 A씨는 이 알바 때문에 아들을 태운 유모차를 끌고 법정에 서게 됐다. 도대체 주부 A씨에겐 무슨 일이 있었던걸까.
A씨의 아르바이트는 채용과정부터 수상했다. 사무실을 찾아가 면접을 보지 않고 고용됐다. 그는 자신을 채용한 회사의 정확한 위치와 현황, 담당직원에 대해서도 몰랐다. 그 뿐만이 아니다. 자신에게 업무를 지시하는 팀장의 얼굴조차 본 적이 없다. 현금을 수거하는 업무인데도 신원보증도 요구받지 않았다.
처음엔 서류만 전달했다. 두 번째부터 현금수거 업무를 했다. 팀장은 현금을 수거할 때마다 각각 다른 이름의 팀장이나 과장의 소개로 왔다고 상대에게 말하라고 했다. 상대에게 먼저 말을 걸지 말라는 당부도 있었다.
돈을 받고 난 뒤 이어진 일도 이상했다. 받은 돈을 100만원 단위로 쪼갠 뒤, 팀장이 텔레그램으로 알려준 여럿인 다른 사람의 주민등록번호를 이용해 지정된 계좌로 무통장 입금을 했다.
A씨가 한 아르바이트는 보이스피싱(전화금융사기) ‘현금수거책’이었다. 보이스피싱에 속은 피해자를 직접 만나 돈을 수거한 뒤 보이스피싱 조직의 계좌로 송금하는 일을 한 것이다.
이 보이스피싱 조직의 사기수법은 이랬다. 먼저 ‘카카오뱅크 정책지원 특례 긴급지원금 저금리 대출’이란 문자를 피해자에게 보냈다. ‘저금리로 2500만원까지 대출해주겠다’는 내용이다. 신청서를 작성하기 위해 문자에 포함된 링크를 클릭하면 휴대전화에 악성프로그램이 설치됐다.
다음 날에는 다른 조직원이 저축은행 직원인 척 피해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300만원을 대출받은 지 3개월이 지나지 않았는데 다시 대출을 신청하는 것은 금융거래법 위반이다. 기존 대출금 300만원에 이자 60만원을 바로 납부하지 않으면 신용불량자로 등록될 수 있다”면서다. “지금 신용도를 유지하기 위해 600만원을 추가로 입금하면 대출을 받을 수 있다”고도 했다.
이에 속은 피해자에게 A씨는 “모 팀장님 요청을 받고 왔다”며 960만원을 건네받았고, 이 돈을 나눠 송금한 것이다. A씨는 사기방조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A씨 측은 “보이스피싱 범죄인지 알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이를 받아 들이지 않았다. A씨가 자신의 업무를 하면서 보이스피싱 범죄일 수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는데도 고액인 임금을 받기 위해 의심스러운 사정들을 외면하거나 용인했다는 이유에서다. 울산지법 형사8단독 황지현 판사는 A씨에게 징역 8개월, 집행유예 2년, 40시간의 사회봉사를 선고했다.
황 판사는 “일반적인 회사의 채용 및 업무지시라고 보기 어렵고, 신원이 명확하지 않은 사람의 지시로 타인에게서 현금을 수거하거나 현금을 소액으로 나눠 무통장입금을 대행하는 일은 이미 널리 알려진 보이스피싱 범행의 전형적 수법과 일치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A씨가 수행한 업무의 강도나 난이도에 비해 급여가 상당히 많고, A씨의 연령·사회경험에 비춰 이러한 범죄 가능성조차 인식하지 못하였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시했다.
보이스피싱 범죄는 2006년 첫 피해가 신고된 후 꾸준히 증가해왔다. 2021년 보이스피싱 범죄 발생건수는 3만982건, 피해금액은 7744억원에 달할 정도였다. 경찰청에 따르면 지난해 검거된 보이스피싱 조직원은 2만5030명이다. 검거된 인원 중 A씨와 같은 현금수거책 등 하부 조직원은 1만4511명. 통신업자 등 5016명, 계좌명의인 4846명이다. 총책 등 상부조직원은 657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