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음력 4월8일, 부처님이 이 땅에 오신 날이다. 성리학을 국가 이념으로 삼은 조선시대에는 전반적으로 불교는 탄압을 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탄압 속에서도 불교는 그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조선시대 불교 중흥에 가장 힘을 기울인 인물은 문정왕후(文定王后)이다. 1517년 중종의 계비로 왕비가 된 문정왕후는 1545년 11월 아들 명종이 왕이 되면서 본격적으로 정치활동을 하였다. 명종은 12살의 나이로 왕이 되었기에 왕실 관례상 성인이 되는 20세까지 대비가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였다. 문정왕후는 수렴청정 기간은 물론이고, 사망할 때까지 권력의 중심에 있었다.
문정왕후가 가장 역점을 둔 것은 불교의 중흥이었다. 승려 보우(普愚)를 등용하였고, 1550년 12월에는 친서를 내려 선종과 교종 양종의 복립(復立)을 명하였다. 그리고 봉은사를 선종의 본사로, 봉선사를 교종의 본사로 삼았다. 사찰이 일방적으로 빼앗겼던 토지를 반환받게 하고, 연산군 때 폐지되었던 승과(僧科) 제도까지 부활시켰다. 성리학 이념 국가를 지향한 사회의 흐름을 정면으로 거스른 정책이었던 만큼 신하들의 반대는 물론이고 성균관 유생들까지 나서 동맹휴학으로 저항했다. 그러나 문정왕후는 흔들리지 않았다. 1565년 4월 문정왕후는 13세로 요절한 손자 순회세자의 명복을 빌어주기 위해 양주 회암사를 중창하고, 이를 기념하는 무차(無遮) 대회를 열었다. 당시 사관들은 “이때 세자를 갓 잃자 요승 보우(普雨)가 복을 기원해야 한다는 말을 떠벌여 무차 대회를 베풀기를 청하였는데, 자전(慈殿)이 그 말에 혹하여 그대로 따랐다. 승려들이 사방에서 모여들어 몇천 명이나 되는지 모를 정도였으며, 조각 장식의 물건을 극도로 화려하고 사치하게 하여 옛날에도 보지 못하던 정도였다. 또 붉은 비단으로 깃발을 만들고 황금으로 연(輦)을 꾸미고 앞뒤로 북을 치고 피리를 불어 대가(大駕)가 친히 임어하는 상황처럼 베풀었으며, 또 배위(拜位)를 마련하여 마치 상이 부처에게 배례하게 하는 것처럼 하였으니, 그 흉패(兇悖)함을 형언할 수 없었다”고 하여 문정왕후의 불교중흥 정책을 신랄하게 비난하였다.
왕을 뒷전으로 몰고 적극적으로 정치에 관여하면서 불교중흥 정책을 펼쳤던 문정왕후도 세월의 벽은 넘지 못했다. 1565년 4월 창덕궁 소덕당에서 65세를 일기로 사망한 문정왕후가 임종 직전 한글로 남긴 유교(遺敎)에는 불교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잘 나타나 있다. “석도(釋道)는 이단이기는 하지만 조종조 이래로부터 다 있어왔고, 양종(兩宗)은 역시 국가가 승도(僧徒)들을 통령(統領)하기 위하여 설립한 것이오. 승도들이 비록 쓸데없는 것이라고는 하나 조정에서는 모름지기 내 뜻을 체득하여 끝까지 옛날 그대로 보존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소. 옛사람 말에 ‘평상시에는 불도(佛道)를 섬길 수 없지만 부모에게 간하여도 만일 고치지 않으면 그대로 따랐다’ 하였으니, 주상이 이단을 금지 억제하더라도 조정에서는 모름지기 내 뜻을 따르오”라는 유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