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수나무가 많아 ‘계촌(桂村)’이라 불리는 마을. 해발고도 700m에 자리한 강원도 평창군 방림면 계촌리에선 특별한 클래식 음악 축제가 열린다. 현대차 정몽구재단과 한국예술종합학교가 손잡은 ‘예술마을 프로젝트’로 2015년 시작됐다. 이름하여 ‘계촌클래식축제’라 불리는 축제 기간에 계촌 마을 전체에 클래식 선율이 울려퍼지지만 연주 중 숨을 멎게 할 정도로 엄숙한 여느 클래식 공연장과 느낌이 완전히 다르다. 마을 주민을 비롯해 평창군 등 전국 각지에서 모인 관객이 음악가들과 어울리는 흥겨운 잔치 마당 같다.
무더위와 비를 피해 한여름에 열리던 축제를 앞당겨 지난 26∼28일 개최한 제9회 계촌클래식축제 현장도 마찬가지였다. 저녁에 ‘별빛 콘서트’가 열리는 ‘클래식 필드’ 주변을 비롯해 마을 곳곳에 먹거리 장터와 특산품 판매 부스가 마련돼 왁자지껄했다. 피아노 모양의 음수대나 ‘베토벤 커피’와 ‘슈베르트 셰이크’ 이름을 붙인 음료 판매점도 웃음을 자아내게 했다.
축제 첫날인 26일 오후 7시쯤, 산촌에 머물던 해가 뉘엿뉘엿해지자 클래식 필드에는 어느새 2500명가량 관객이 들어찼다. 금요일이라 그런지 나이가 지긋한 평창 지역 주민이 많았지만 어린 자녀를 데리고 온 가족단위 방문객이나 부부, 연인끼리 온 사람도 적지 않았다. 곧이어 피에타리 잉키넨 음악감독이 이끄는 KBS교향악단과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우승자(2007년) 출신 피아니스트 안나 비니츠카야가 개막 무대에 오르자 남녀노소 관객은 밝은 얼굴로 환영했다.
KBS교향악단은 올해 탄생 150주년인 라흐마니노프(1873∼1943,러시아)의 곡들로 축제의 서막을 열었다. 1부에서 비니츠카야와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광시곡’을 협연한 뒤 2부에서 교향곡 제2번을 들려줬다. 클래식 전용 콘서트홀은 물론 일반 실내 클래식 공연장 환경에도 훨씬 못미친 야외 무대였지만 잉키넨과 KBS교향악단, 비니츠카야는 최고의 연주로 관객의 눈과 귀를 사로잡았다. 대부분 트로트 등 대중가요에 익숙하고 클래식 음악은 낯설 것 같은 지역 노인들도 공연이 끝날 때까지 자리를 지키며 감상했다.
계촌클래식축제 공연장 풍경은 일반 클래식 공연장과 차원이 달랐다. 흐린 하늘에 별은 보이지 않았지만 달빛 아래 무대 뒤의 병풍처럼 늘어선 푸른 나무 숲과 풀벌레 소리 등 자연이 빚어낸 공기도 색다른 맛을 선사했다.
공연 중에 어린 아이 등 일부 관객이 스마트폰 등 전자기기를 작동하거나 자리를 옮겨 다녀도, 악장이 끝날 때마다 큰 박수소리가 나와도 누구 하나 얼굴을 찡그리지도, 그런 행동들을 제지하지도 않았다.
2번 교향곡 연주가 끝나자 객석에선 갈채와 함께 ‘앵콜(앙코르)’을 외치는 소리가 쏟아졌다. 클래식 공연에 어울리는 ‘브라보’ 소리도 있었지만 앵콜 소리들에 비할 바 아니었다. 이처럼 박수 타이밍 등 ‘클래식 공연장 에티켓’과 거리가 먼 장면들이 잇따랐지만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잉키넨도 미소를 지으며 손 짓으로 다음 연주 신호를 보내곤 공연에 집중했고, 앙코르 요청에는 상당수 관객이 제목은 몰라도 들어봤음직한 라흐마니노프 ‘보칼리제’로 화답했다.
경기 화성에 거주하다 지난해 평창으로 귀농했다는 김모(71)씨는 “계촌클래식 축제엔 처음 와봤는데 지역 주민들이 오랜 만에 한자리에 모여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아름다운 음악도 감상할 수 있어 매우 좋았다”고 말했다.
이튿날에는 비가 내렸지만 축제 열기는 더욱 고조됐다. 계촌초등학교 옆 상설무대인 ‘클래식 파크’에서 오후 3시 시작된 파크 콘서트에는 계촌클래식축제의 또다른 주인공들이 무대에 올랐다. 계촌초와 계촌중학교 학생들로 구성된 ‘별빛오케스트라’가 공연을 펼쳤다. 2009년 창단한 계촌초 오케스트라는 2011년 ‘2018 동계올림픽 평창 유치 기원 연주회’ 무대에도 서는 등 계촌마을이 예술마을 프로젝트에 선정되고 클래식 마을이 되는 데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계촌초 졸업생이 계속 클래식 연주 활동을 이어가도록 2012년 계촌중에도 오케스트라가 생겼다. 빗줄기에도 학생들은 방과후 활동 시간에 갈고 닦은 연주 실력을 뽐냈다. 계촌초 학생들은 드보르자크의 ‘신세계’ 등 클래식 모음곡을, 계촌중 학생들은 차이콥스키의 ‘호두까기 인형’ 중 꽃의 왈츠와 브람스의 ‘헝가리 무곡’ 5번 등을 선보였다.
우비를 입은 수백명 관객이 별빛처럼 빛난 학생들의 무대에 큰 박수를 보냈다. 당일 저녁 클래식 필드에서 열린 두 번째 무대에선 2021년 페루초 부소니 국제 피아노 콩쿠르 우승자인 피아니스트 박재홍이 크누아 윈드 오케스트라와 멋진 음악을 들려줬다. 전날보다 많은 3000여명 관객은 잊지 못할 빗속 클래식 공연을 감상했다. 축제 마지막 날에는 피아니스트 조재혁과 모차르트 국제 콩쿠르에서 우승한 현악 4중주단 아레테 콰르텟 등의 무대가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