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한 농학교에 재학 중인 김수아(가명·18)양은 오랫동안 비장애 학생들과 함께 일반 고등학교에 다녔다. 수어 교육을 받거나 수어로 소통하지 않고 초·중·고교 시절 대부분을 보낸 것이다. 청각장애를 가진 채 구어만 쓰는 일반학교에 다니는 건 만만치 않았지만, 청인(청각을 사용하는 사람) 중심 사회에 적응하는 것이 우선순위라는 판단에서였다. 그러나 지난해 가을, 수아양은 결국 일반학교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특수학교로 전학했다. 그제야 농인의 제1언어인 수어(手語)를 배웠다. 농인은 청각장애인 중 수어를 일상어로 사용하는 사람으로, 국내에 약 5만2000여명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수아양은 농학교에서 늦게나마 수어를 배우면서 일반학교에 다닐 때와 달리 친구들과 어울리는 일이 부쩍 늘었다. 한때 수어에 대해 부정적이었던 어머니 김미선(가명·47)씨도 이제는 딸의 수어 공부를 응원하고 있다. 김씨는 “보청기를 끼고 일반학교에서 구어로 소통하던 수아가 특수학교에서 수어를 배우면 도리어 말을 못하게 될까 걱정했다”고 털어놨다.
그러나 수아양이 농학교에 전학 가고 싶은 10여개의 이유를 적어 보여줬을 때 마음이 바뀌었다. 김씨는 29일 세계일보 취재진에게 “딸이 구어로 오가는 말들이 이해가 안 되고 반응할 수 없으니 책상에 엎드려 잘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며 “친구 관계가 가장 중요한 시기에 얼마나 힘들었을지… 아이를 일반학교에 다니게 한 것이 엄마의 욕심이었던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고 말했다.
◆‘소리만능주의’ 속 부진한 수어교육
한국의 많은 청각장애 학생이 수아양과 같이 언어능력 발달 집중기를 지난 뒤 수어를 습득하고, 형식적인 통합교육 속에서 학교생활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음성언어 사용이 우월하다고 믿으며 농인에게 청인처럼 행동하라는 압박이 강한 청능주의(오디즘·Audism)가 배경으로 지목된다. 수어를 자연스럽게 가르치고 사용하는 분위기를 저해하면서, 청각장애 학생들은 갈수록 고립감에 빠지는 악순환이 초래되는 것이다. 한국수어가 한국어와 함께 공용어로 지정된 지 약 7년이 지났지만, 수어 사용자를 위한 수어 교육과 통역 지원 실태 등은 여전히 초라하다. 이들 농인들은 우리 사회에서 교육을 받거나 주변 사람들과 교류하는데 있어서 불편을 겪고 편견과 차별을 받고 있는 것이다.
오는 3일 농인의 날을 앞두고 살펴본 세계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청각장애를 가진 학생 상당수는 수어 교육보다는 소리를 듣게 만드는 인공와우 수술 등을 통한 일반학교 적응에 더 집중하는 경향이 강했다. 수어를 사용하면 어렵게 살아가리라는 편견 등이 작용해 수어 교육 시기가 늦춰지는 것이다. 수어 배울 때를 놓친 청각장애 아동은 의사소통 능력뿐 아니라 문해력과 작문력 등의 발달이 저해될 수 있어 우려가 제기된다.
국립국어원 조사(2020년)에 따르면 한국에서 청각장애인의 수어 교육 평균 연령은 15.6세다. 특히 농인 10명 중 9명(95%)은 언어능력 발달 집중기인 유아동기 이후에 수어를 배운다. 국가인권위가 2019년 조사했을 때 평균 연령인 12.3세보다 늦어진 것은 물론이고, 청인이 생후 12개월 무렵부터 말을 배우는 것과는 큰 차이를 보인다.
4년 전 국립국어원 조사를 진행했던 이준우 강남대 교수(사회복지학부)는 지금도 별반 상황이 다르지 않다고 분석했다. 한국수어학회장이기도 한 그는 “청능주의로 가득 찬 한국 사회에서 부모들은 청각장애 자녀의 인공와우 수술과 보청기에 의존한 언어 치료에 몰두하는 경향이 있다”며 “수어를 가르치지 않고 구어만 교육하면서 무조건적 통합교육을 하면 청각장애 학생들은 교과 내용을 심층적으로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고 지적했다.
◆구어·수어 함께 가르쳐야
서울의 한 공립 초등학교에 다니는 농인 A(7)군의 경우에는 인공와우 수술을 받느라 수어를 제때 배우지 못하면서 한국어와 수어를 둘 다 잘 구사하지 못하게 됐다. 인공와우 수술은 보청기로도 소리를 듣지 못하는 고도 난청 환자들에게 인공와우를 달팽이관에 이식하는 수술로, 손실된 청각을 회복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다. 하지만 수술 효과는 사람마다 편차가 크고, 수술한다고 온전한 청력을 반드시 갖게 되는 것도 아니다. 이처럼 시간을 지체하는 사이, A군은 주변인과 소통하거나 학교에서 공부하는 일이 두 배로 힘들어졌다.
전문가들은 청각장애 학생에 대한 수어 교육의 중요성을 입 모아 강조했다. 최상배 공주대 교수(특수교육과)는 “한국은 한국어 단일 교육을 중시하다 보니 청각장애 학생이 어려움이 있어도 수어가 아닌 구어로 공부해야 하는 환경”이라고 지적했다. 한국에서 수어 과목은 2022년에야 특수교육 교육과정에 처음 들어갔다. 미국이 제2언어 과목으로 미국수어를 두고 있는 것과 대조된다.
1864년 설립된 세계 최초 농인 고등 교육기관인 미국의 갤러뎃 대학도 공용어는 미국수어다. 학교 구성원 중 청인도 상당 비율을 차지하지만 모두 수어를 사용해야 한다. 갤러뎃 대학의 모든 수업은 수어로 진행되고, 시각 중심 언어인 수어에 맞게 건물과 가구 배치도 시각 중심으로 디자인됐다. 이를테면 강의실 의자는 앞사람의 등을 쳐다보는 배치가 아니라, 교수를 중심으로 원형으로 배치돼 모두의 손과 입을 보며 수어로 대화할 수 있다. 건물 내부는 층마다 단절돼 있지 않고, 개방형 홀 구조로 1층에서 2층 사람에게 수어로 말을 걸 수 있다. 이곳 학생들의 학교, 연애생활을 다룬 다큐멘터리 ‘데프유(DEAF U)’를 보면 미국수어를 제1언어로 쓰며 5~6대째 농인이 태어나는 가정에 대해 ‘엘리트’ 집안이라고 칭하는 장면도 나온다.
최 교수는 갤러뎃 대학의 경우처럼 수어에 대한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고교학점제에서 외국어 선택과목으로 한국수어를 과목으로 채택하면 사람들이 수어에 대해 알 수 있게 될 것”이라며 “농인들이 이러한 수어 교육에서 중추적 역할을 하는 등 일자리 창출 효과도 기대된다”고 설명했다.
김미실 국립청각장애학습지원센터장은 “이대로라면 청각장애 교육이 사라지는 시대가 올지 모른다”며 “청각장애인이 한국어와 수어 둘 다 배울 수 있는 이중언어 접근 환경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이어 “가족에서조차 혼자만 청각장애인인 학생은 수어를 배울 수 없고 자신의 정체성을 두고 혼란을 겪을 수 있다”고 덧붙였다.
<관련 기사>
[심층기획-말뿐인 공용어…설 곳 없는 한국수어(手語)]
<상> ‘소리강요사회’ 속 외면받는 수어 교육
① [단독] 무늬뿐인 장애학생 통합교육, 특수학교 재학 절반은 전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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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청능주의의 폐해’… 농인 95%가 10살 넘어 수어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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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전국 특수학교 192개교 중 농학교는 14곳 불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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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 수어통역, 법만 만들고 예산은 나 몰라라
④ [단독] 한 달 800건 넘게 수어 통역도… 격무에 이직 빈번 농인만 속앓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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⑤ TV자막 아바타수어 번역…예산 부족에 상용화 난항
https://www.segye.com/newsView/20230530514732
<하> 문화 빈곤 시달리는 수어 사용자
⑥ [단독] 한글 단어에 수어만 연결 ‘반쪽 사전’… “유튜브 보고 배워요”
https://www.segye.com/newsView/20230531516227
⑦ [단독] 청각장애인 10명 중 3명 “1년간 영화관람 못했다”
https://www.segye.com/newsView/20230531516226
<다하지 못한 이야기>
⑧ 침묵과 소리의 경계… ‘소리 없이 빛나는’ 코다(CODA)
https://www.segye.com/newsView/20230603504469
⑨ 농인 수어통역사를 아시나요?
https://www.segye.com/newsView/20230603505351
⑩ 0.0007%의 기회…장애인·비장애인 ‘같이’ 관람하는 ‘가치봄’ 영화 관람해보니 [밀착취재]
https://www.segye.com/newsView/202306045001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