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한 달 800건 넘게 수어 통역도… 격무에 이직 빈번 농인만 속앓이 [심층기획-말뿐인 공용어…설 곳 없는 한국수어(手語)]

<중> 수어통역, 법만 만들고 예산은 나 몰라라

2022년 중증 청각 장애인 8만8668명
지자체 통역센터 통역사 4∼5명 불과
문화행사 기획·회계 업무까지 도맡아
정규직 불구 평균 재직기간 7년 불과

대형병원 통역사 없으면 오진 불가피
마스크 쓴 의료진 말 이해할 수 없어
화재 등 긴급 상황 땐 위험 처하기도
“수어통역은 필수… 예산 등 배려 필요”
학부모 공개수업 현장은 설렘과 떨림의 현장이다. 자녀의 발표를 듣는 학부모들 얼굴에는 흐뭇함이 어리고, 잘 해내고 싶은 아이들 얼굴에는 긴장감이 감돈다. 또박또박 발표를 마친 아이들이 씨익 웃어 보이면 부모들은 박수로 화답한다. 이런 보통의 풍경이 청각장애를 가진 김옥미(48)씨에게는 잊을 수 없는 날이 됐다. 김씨는 아들 이승헌(19)군이 초등학교 5학년이던 2015년 봄 공개수업 장면을 떠올릴 때마다 뭉클해진다. 학부모 초대장을 받은 그는 수어통역을 지원받고 싶었다. 하지만 통역센터 인력은 언제나처럼 부족했다. 결국 김씨는 통역사 없이 홀로 교실에 들어섰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적막 속에서 자기소개하는 아이들의 입 모양만 바라보며 ‘저 친구가 승헌이가 좋아한다는 아이일까’ 궁금해할 뿐이었다.

 

드디어 차례가 된 승헌군의 자기소개는 김씨를 깜짝 놀라게 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승헌군은 오른손 손바닥으로 왼팔을 쓸어내린 후, 꼭 쥔 두 주먹을 가슴팍 아래로 내렸다. “안녕하세요, 엄마” 수어였다. 고요한 세계 속 홀로 서 있던 엄마에게 가장 익숙한 언어로 자신을 소개한 것이다. 김씨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이듬해인 2016년 2월 한국 수어를 국어와 동등한 지위로 인정하는 ‘한국수화언어법’이 제정됐다.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수어를 일상어로 사용하는 농인을 위해 수어통역 마련 등 언어 환경을 개선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이제 학부모 공개수업 현장에서 김씨처럼 소리 없는 교실에 우두커니 있지 않아도 될까. 법이 만들어진 지 7년이 흘렀지만, 2023년 현재도 상황은 딱히 나아진 것이 없어 보인다.

 

◆수어통역사 1명이 농인 100명 담당

 

전국 시·도 지자체는 청각장애인을 위한 공공 수어통역센터를 운영한다. 지난해 보건복지부에 등록된 청각장애인(42만5224명) 중 중증 청각장애인은 8만8668명으로 나타났다. 센터의 청인·농인 수어통역사들은 수어를 제1언어로 사용하는 농인들(약 5만2000명) 외에도, 구화(입 모양)나 필담·그림으로 소통하는 중증 청각장애인에게도 통역을 지원하고 다양한 문화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청인 통역사는 음성언어를 쓰는 청인과 청각장애인 사이를, 농인 통역사는 청인 통역사와 청각장애인 사이를 잇는 역할을 한다.

 

30일 세계일보가 정의당 장혜영 의원으로부터 전국 17개 시·도 지자체 수어통역센터 현황을 받아 분석한 결과 지자체 통역센터의 만성적인 인력 부족 문제, 노동 강도는 심각한 수준이었다. 지난해 말 기준 각 지자체 통역센터에는 평균 3∼4명의 청인 통역사와 1명의 농인 통역사가 근무했다. 지자체별 중증 청각장애인 현황을 감안할 때, 통역사 1명당 지원하는 청각장애인은 평균 100여명에 달했다.

서울의 한 수어통역센터에 근무하는 농인 통역사 이목화(48)씨는 “한 달에 180건의 통역 지원을 하면 (목표치) 100%를 채운 것이지만, 300건을 넘길 때도 많고 복지카드 등 새로운 복지 정책이 나오면 (이를 설명하기 위해) 800건을 넘긴 적도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법원이나 경찰 통역은 꼭 현장에 가는데 요청에 비해 늘 인력이 부족하다”고 부연했다. 서울의 또 다른 통역센터에서 근무하는 청인 통역사 A씨도 “통역사가 통역뿐 아니라 회계·문서·행사기획까지 모두 도맡아 노동강도가 세다“며 “요청이 중복되면 우선순위에 따라 지원하는데, 일상적인 병원 방문은 순위에서 많이 밀린다”고 했다.

 

비수도권의 상황은 더 심각했다. A씨는 “지방에서는 한 사람을 통역하기 위해 1∼2시간씩 이동해야 하는데, 통역사가 손오공도 아니고 분신술을 쓸 수 없다”며 “통역 요청이 들어와도 미안하다고 다음으로 미루며 양해를 구하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토로했다. 그는 이어 “지방에는 특히 고령사회가 가속화되면서 난청 등 청각 장애가 생긴 어르신들이 많은데, 영상통화도 못 하셔서 지원이 더 어렵다”고 덧붙였다.

 

지자체 통역사들은 공무원에 준하는 정규직이지만, 평균 재직 기간은 7년에 불과했다. 과중한 업무 탓에 격무에 시달리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통역사가 자주 교체되고, 농인들은 병원 기록 등 민감한 개인정보를 매번 다시 설명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이를 두고 한 농인은 “통역사 앞에서 발가벗겨지는 기분”이라고 암울해했다.

 

◆대형병원, 경찰서 등 수어통역 시급

 

현행법상 국가와 지자체는 공공행사, 사법·행정 등의 절차, 공영방송 등 공익상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경우에 수어통역을 지원해야 한다. 그러나 국회와 법원 등을 제외하면 여전히 수어통역 서비스는 걸음마 수준이다. 특히 농인들은 대형병원에 수어통역사가 상주하길 바라는 목소리가 컸다. 아픈 부위와 증상을 정확히 설명해야 하는데, 통역사가 없으면 의사와 잘못된 정보를 주고받을 수 있어서다.

 

서울 서대문구 세브란스병원에 정기 검진을 다니는 이목화씨는 큰 수술을 받은 후 수어통역사가 없어 아찔했던 경험을 털어놨다. 마취 기운에 잠들려던 찰나 간호사가 무언가 말을 걸었지만 들리지 않아 눈앞이 캄캄해졌다. 당황하는 이씨에게 간호사가 ‘잠들지 마세요’라는 글씨를 보여 주고서야 정신을 붙들었다. 그는 잠 기운이 몰려오는 와중에 통증을 참아가며 필담으로 의료진과 소통해야 했다. 이씨는 “야간에 응급 상황이 발생하면 영상통화로 통역을 지원받거나 필담으로 소통하는데 정확한 소통이 안 된다”며 “대형병원에 수어통역사가 2명은 상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20년 이상 농인들 곁에서 수어통역을 하고 있는 윤남(49)씨도 “농인은 아이를 낳을 때 ‘힘주세요, 잘하고 있어요’ 하는 말들을 들을 수 없는데, 의사와 간호사는 모두 마스크를 쓴 채 말을 한다”며 “누워 있는 농인 산모에게 고통은 계속되는데 마스크가 들썩거리는 것만 보인다. 이는 굉장히 공포스러운 경험”이라고 했다.

 

긴급한 상황일수록 정보 접근성이 중요한데 공공시설에 수어통역이나 자막이 미비하면 농인의 안전이나 권리는 보장받기 힘들어지는 것이다. 수어가 제1언어인 김옥미씨는 “지하철 전광판에 긴급 상황이 발생하면 음성과 자막만 나오는데, 농인이 한글을 잘 모르는 경우도 많아 수어 자막도 필수”라며 “화재나 응급상황에서 상황 설명을 듣지 못한 농인은 대피가 늦어질 수 있다”고 꼬집었다. 이목화씨도 “억울한 사건을 겪고 대한법률구조공단에 가면, 농인들은 수어통역이 이뤄지면 시간이 배로 걸리는데 일반인과 마찬가지로 상담 시간을 20분으로 제한해 법률 정보를 충분히 제공받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2021년 5월17일 중앙재난대책본부의 코로나19 관련 브리핑 당시 제공됐던 수어 통역 장면. 연합뉴스

다행히 대형병원의 수어통역 서비스는 발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지난 22일 서울대학교병원은 전국에서 세 번째로 수어통역사를 갖춘 장애 친화 산부인과를 열었다. 앞서 전북 예수병원과 건강보험공단 일산병원이 장애 친화 병원으로 거듭났다. 보건복지부(복지부)는 지난 2021년부터 장애 친화 산부인과 10개소를 지정하고, 기관 개소 시 매년 운영비 1억5000만원을 지원하고 있다. 아직 갈 길이 멀다. 김정연 복지부 장애인건강과장은 “법 시행에 맞춰 장애 친화 산부인과 지정기준 및 절차 등을 담은 시행규칙 개정과 예산 확보 등 후속조치에 만전을 기하겠다”고 말했다.

 

장 의원은 “농인과 청각장애인에게 수어통역은 있으면 좋은 게 아니라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며 “앞으로도 장애인들이 주어진 만큼이 아니라 필요한 만큼 소통할 수 있도록 예산 배분 등 과정에서 정치가 제 역할을 다해야 할 것”이라고 촉구했다.

 

<관련 기사>

 

[심층기획-말뿐인 공용어…설 곳 없는 한국수어(手語)]

 

<상> ‘소리강요사회’ 속 외면받는 수어 교육

 

① [단독] 무늬뿐인 장애학생 통합교육, 특수학교 재학 절반은 전학생

https://www.segye.com/newsView/20230529509059

 

② ‘청능주의의 폐해’… 농인 95%가 10살 넘어 수어 배운다

https://www.segye.com/newsView/20230529509101

 

③ 전국 특수학교 192개교 중 농학교는 14곳 불과

https://www.segye.com/newsView/20230529509100

 

<중> 수어통역, 법만 만들고 예산은 나 몰라라

 

④ [단독] 한 달 800건 넘게 수어 통역도… 격무에 이직 빈번 농인만 속앓이

https://www.segye.com/newsView/20230530514742

 

⑤ TV자막 아바타수어 번역…예산 부족에 상용화 난항

https://www.segye.com/newsView/20230530514732

 

<하> 문화 빈곤 시달리는 수어 사용자

 

⑥ [단독] 한글 단어에 수어만 연결 ‘반쪽 사전’… “유튜브 보고 배워요” 

https://www.segye.com/newsView/20230531516227

 

⑦ [단독] 청각장애인 10명 중 3명 “1년간 영화관람 못했다”

https://www.segye.com/newsView/20230531516226

 

<다하지 못한 이야기>

 

⑧ 침묵과 소리의 경계… ‘소리 없이 빛나는’ 코다(CODA) 

https://www.segye.com/newsView/20230603504469

 

⑨ 농인 수어통역사를 아시나요?

https://www.segye.com/newsView/20230603505351

 

⑩ 0.0007%의 기회…장애인·비장애인 ‘같이’ 관람하는 ‘가치봄’ 영화 관람해보니 [밀착취재]

https://www.segye.com/newsView/202306045001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