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로 위축됐던 마음, 맥주축제로 보상받자.’
6월이 되면서 맥주를 주제로 한 ‘시원한’ 축제열기가 달아오르고 있다. 전북 군산시가 16일부터 사흘 동안 근대역사박물관에서 맥주축제를 열기로 하는 등 유쾌한 조짐은 이미 고양되고 있다. 군산시의 ‘군산 수제맥주 & 블루스 페스티벌’은 지난해에 이어 올해 두 번째로 열린다. 올해 축제를 찾을 것으로 예상되는 방문객은 3만명이다. 소도시 축제치고는 많은 숫자이다. 지난해엔 1만7000명이 다녀갔다.
지역을 달구는 이런 맥주축제는 6월에만 10여개다. 6월 축제가 인기를 끄는 이유는 있다. 맥주가 가장 인기를 끄는 때는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여름철이지만, 여름은 축제를 하기엔 버거운 날씨다. 폭염과 장마 등을 피할 수 있는 6월이 적기인 것이다. 맥주축제의 핵심은 수제맥주(크래프트 비어)다. 수제맥주는 어느새 여러 지역에서 대표 상품으로 자리 잡고 있다. 고유한 맛과 향, 지역 중소기업 육성, 방문객 유인이 버무려지며 인기를 끌고 있다. 개인이나 소규모 양조장이 여러 원료에 자체 개발한 제조기법을 접목하면서 이래저래 주류시장에 새바람을 불어넣고 있다. 수제맥주는 주로 다품종 소량 생산을 원칙으로 한다. 효모와 유산균, 미생물 등을 가미해 색다른 풍미로 공략하고 있다. 국산 수제맥주는 짧은 기간에 세계 유수의 수제맥주 품평회 등에서 수상을 거머쥘 정도로 높은 품질을 인정받고 있다.
장밋빛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해외 수출도 늘어나면서 ‘K-비어’ 시대가 열릴 것이라는 전망이 나올 정도였지만, 한편에서는 우려가 증폭되고 있다. 일본 수입 맥주와 와인 등 주류 대체재의 경쟁력이 여전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엔데믹 이후 외식 소비가 늘어나는 와중에 일본 맥주 소비가 늘고 있고, 와인·위스키·하이볼 등 주류 상품이 다양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MZ세대(1980∼2000년 출생)를 중심으로 큰 인기를 끌어온 편의점 수제맥주 매출의 하락세가 포착되고 있다. 수제맥주의 지속가능한 성장을 위해 돌파구가 필요하다는 게 업계의 시각이다.
◆맛·향 차별화… 맥주 본고장도 ‘엄지척’
세븐브로이는 수제맥주에 일찌감치 뛰어들어 업계의 선두주자로 꼽힌다. 2003년 독일 블루마스터를 영입해 서울역 근처의 작은 맥주 전문점에서 출발해 2012년 최초로 달콤하면서도 과일향이 나는 국산 에일 캔맥주를 출시했다. 때마침 외부 유통을 할 수 있는 일반면허를 최초로 취득하면서 국내 ‘수제맥주 1호’ 기업이 된 이후 20여년간 수제맥주의 다양성과 매력을 알려왔다.
업체는 수제맥주 시장 확산세에 힘입어 이듬해 강원도 횡성에 이어 양평공장을 증축하고 2020년엔 대한사료와 손잡고 ‘곰표밀맥주’를 선보여 3년 동안 5850만캔 이상 팔아치우며 대히트했다. 지난해는 전북 익산 국가식품클러스터에 수제맥주 공장을 추가로 가동하고 자동화시스템을 구축해 국내 수제맥주업계 최대인 매월 450만캔 생산이 가능해졌다. 또 같은 해 해외 수출을 재개해 유럽과 일본, 동남아시아 등 14개국으로 무알코올맥주와 수제맥주 제품을 수출하고 있다.
대구 대표 관광지인 중구 ‘김광석거리’에 자리한 대도양조장은 해외에서도 품질을 인정받는다. 2019년 창립 이후 2년 만인 2021년 싱가포르에서 열린 아시아비어챔피언십에서 수제맥주 ‘대도 골든에일’이 골든에일부문 금상을 수상했다. 이를 포함해 11개 출품작 중 7개가 수상했고 업체는 ‘아시아 최고 브루펍’에 선정됐다.
2015년 부산 광안리에서 출발한 와일드웨이브는 국내 최초 사우어 맥주로 이름난 곳이다. 일대 펍을 중심으로 파트너 양조장과 협력해 집시 브루잉 프로젝트를 진행해 첫 수제맥주로 ‘설레임’을 출시했다. 설레임은 수제맥주 본연의 깊은 풍미와 함께 신김치나 동치미, 레몬, 열대과일에서 풍기는 산미를 느낄 수 있어 출시와 동시에 한국인은 물론 외국인들도 입맛을 사로잡아 지역과 대한민국을 넘어 싱가포르, 홍콩 등 세계시장 진출에 성공했다.
삼다도의 고장인 제주도의 제주맥주는 ‘위트에일’, ‘페일에일’ 등으로 대표하는 다양한 종류의 수제맥주를 전문적으로 생산하고 있다. 제주 특색을 담은 제품과 체험형 관광 프로그램을 구축하며 국내 수제맥주 1위로 떠오르더니, 창업 7년 만인 2021년에는 국내 동종 업계 최초로 코스닥 시장에 상장했다. 제주 기업 가운데는 제주반도체 이후 두 번째 상장기업이다. 한국수제맥주협회에 따르면 국내 수제맥주업체는 면허수를 기준으로 2017년 101개에서 지난해 171개로 5년 새 70% 증가했다.
◆지역 농가와 상생…지자체도 적극 지원
지자체들도 수제맥주 시장 성장에 주목해 제품 연구개발을 지원하고 지역축제를 개최하는 등 활성화를 도모하고 있다. 전북 군산시는 도시재생 사업을 통해 원도심인 금암동 째보선창(죽성포구)에 방치된 옛 수협어판장 건물을 리모델링해 ‘군산비어포트’라는 수제맥주 체험관으로 탈바꿈시키고 청년 창업가들을 양조 전문인력으로 육성해 지난해 문을 열었다. 비어포트에는 맥주보리로 싹 틔운 맥아를 직접 발효시켜 연간 18종의 맥주 130t을 생산할 수 있는 공동양조장과 200석 규모의 시음장, 창업자들이 운영하는 체험판매관 등을 갖췄다.
이곳 수제맥주의 가장 큰 특징은 맥아 원료 이외 알코올 발효를 위한 전분, 당 등을 전혀 첨가하지 않은 100% 곡물 맥주라는 점이다. 거품이 풍부하고 맥아향이 진해 입안 가득 정통 맥주의 풍미를 느낄 수 있다는 입소문을 타면서 방문객이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다. 맥아도 국내 양조장 중 유일하게 수입산 대신 이 지역 농가와 계약 재배한 보리를 전량 이용하고 있다.
군산시는 국내 최초로 지역 농산물을 이용해 수제맥주 원료의 국산화를 이뤘다. 시는 수제맥주 시장 성장세에 주목해 지역 기후와 풍토에 가장 적합한 맥주보리 품종(광맥)을 선택하고 전용 재배단지(32㏊)를 조성했다.
대구시도 2021년 지역 수제맥주 업체인 대경맥주와 대도양조를 지원해 지역을 대표하는 수제맥주로 ‘대구 탄 비어’, ‘세븐 락 비어’, ‘80 맥주’ 등 3종을 개발했다. ‘대구산맥’이라는 공동 브랜드와 6종의 상표도 특허청에 출원했다. 대구시는 대구테크노파크와 함께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사업비 1억원을 들여 수제맥주산업 기반을 확보하고 아카데미를 운영해 저변 확대를 중점적으로 추진하는 ‘수제맥주산업 활성화 사업’을 편다.
◆팬데믹 ‘특수’ 이어 엔데믹으로 ‘위기’
국내에서 다소 생소했던 수제맥주가 이처럼 활기를 띠게 된 것은 2014년부터다. 주세법이 개정으로 외부 유통이 불가능한 소형 양조장의 맥주 제조와 유통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2000년에는 맥주 가격에 세금을 붙이는 종가세에서 용량에 따라 세금을 매기는 종량세로 법이 개정됐다. 수제맥주업체에 대한 대대적인 투자가 이어졌고 수제맥주 가격을 낮출 수 있게 됐다.
코로나19 확산도 수제맥주의 돌풍을 일으키는 계기가 됐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외식·회식이 급감하면서 ‘혼술(혼자 마시는 술)’과 홈술(가정 내 음주)’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정형화된 맛에서 벗어나려는 소비자들의 취향 변화도 한몫했다. 일본의 수출 규제로 인한 일본 맥주 불매 운동도 국내 수제맥주 토양을 튼실히 했다. 수제맥주 제조 공장과 전문점들이 속속 등장했다. 대량생산 체계를 갖춘 대기업이 다품종 소량 생산에 의존한 중소 맥주 양조장과 손을 잡고 수제맥주 시장에 가세해 히트상품을 속속 만들어내고 있다.
코로나19 엔데믹 도래로 상황은 또다시 역전됐다. 위스키·와인 등 고급양주류, 원소주 같은 전통주로 시장의 관심이 이동하면서 성장세가 한풀 꺾였다. 수제맥주업계 상장 1호이자 상표권 기간 만료로 대한사료와 함께 ‘곰표밀맥주’를 재생산 중인 제주맥주는 최근 공시한 분기보고서를 통해 연결재무제표 기준 올 1분기 영업손실이 20억5600만원으로 집계됐다고 밝혔다. 해당 수치는 2022년 1분기 영업손실 14억7600만원과 견줘 적자가 39.3% 늘어난 것이다.
업계 관계자는 “수제맥주가 엔데믹 국면으로 접어들면서 위축되고 있다”며 “맥주 제조에 다양한 재료를 사용하도록 제도 개선이 필요하고, 업계도 수제맥주 정체성을 유지해 차별화된 맛을 보여주기 위한 노력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