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른 주먹의 검지를 펴서 코 오른쪽을 쓸어내리며 엄지를 편다. ‘아빠’. 똑같이 오른 주먹의 검지로 코 오른쪽을 쓸어내렸지만 이번에는 새끼 손가락을 편다. ‘엄마’.
우렁찬 울음소리로 세상에 존재를 알린 이다빈(20)씨가 어린 시절 마주한 세상은 다른 어떤 곳보다 고요했다. 하지만 작은 생명이 행여 바스라질까 동분서주하는 김옥미(48)·이재원(50)씨 부부의 모습은 새 가족을 맞이한 그 어느 집안과도 다를 바 없었다. 다빈씨를 품에 안은 부부의 등허리엔 쉴 새 없이 끈끈한 땀방울이 흘러 내렸다. 하루의 반 이상을 쌔근쌔근 잠만 자던 다빈씨는 곧 손가락 열 개를 꼼틀대며 제 눈앞의 어머니, 아버지의 언어를 따라하기 시작했다. ‘소리가 들리지 않는’ 집안에서 수어는 자연스러운 일상 언어였다. 다빈씨가 자라는 내내 수어는 공기처럼 그녀 곁을 맴돌았다.
다빈씨는 초등학교에 입학하며 본격적으로 ‘다르다’라는 단어의 무게를 감각했다. 선생님들은 아빠, 엄마와 달리 음성언어로 모든 것을 전달했다. 친구들은 학교에 오면 지난밤 엄마와 불을 끄고 누워 소곤소곤 대화를 나누다 잠들었다고 말했다. 손과 눈을 보지 않고 대화하는 것은 다빈씨 세상에선 상상하기 어려웠다.
‘소리가 들리는 상태’가 당연한 세상에선 수어가 설 곳이 없었다. “부모가 청각 장애인인데, 딸은 말을 하네?”, “저게 수어인가봐.” 장을 보러 마트에 가면 수어로 대화하는 다빈씨 가족을 보고 사람들은 쑥덕였다. 다빈씨는 수어를 이상하게 보는 세상이 오히려 낯설었다.
다빈씨는 음성 언어를 듣고 말할 수 있는 청인이지만, 그녀의 또 다른 이름은 코다(CODA·Children of Deaf Adults)이다. 수어로 소통하는 농인 부모를 둔 청인 자녀를 뜻한다. 다빈씨와 같이 소리와 침묵의 세계 경계를 넘나드는 코다들에겐 농인의 세상과도, 청인의 세상과도 전혀 다른 ‘코다만의 고유한 세상’이 펼쳐졌다.
◆“아이에게 ‘통역’은 고된 일”…국가의 일 코다가 대신
코다는 피치 못하게 ‘통역사’ 역할을 맡게 된다. 부모와 세상의 연결고리가 된다는 것은 분명 의미 있는 일이지만, 어린 나이부터 동사무소와 병원, 학교 등을 오가며 어른도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을 전하는 것은 분명 머리를 쥐어뜯게 하는 고난이다.
다빈씨가 8살 무렵 어머니 김옥미씨는 집으로 짜장면을 배달시켜 먹기로 ‘결심’했다. 청각장애가 있는 김씨에게 전화 주문이란 그야말로 ‘굳은 마음’이 필요한 일이었다. 10여년 전 그 시절엔 지금과 같이 모바일 배달 애플리케이션이 없었다. 김씨는 음식 목록과 집주소를 적어 다빈씨에게 주문해보겠느냐고 물었다. 친구들과 어울리며 한국어를 빠르게 익힌 다빈씨는 자신이 있게 전화를 걸었다.
“장난치지 말라!” 차분히 음식 목록과 집주소를 말한 다빈씨에게 예상 밖의 반응이 돌아왔다. 중국집 주인은 8살 꼬마의 장난 전화라 생각해 버럭 화를 내며 끊어버린 것이다. 놀라서 울음이 터진 다빈씨와 함께 김씨도 미안함에 눈물을 흘려야 했다.
2016년 2월 한국수어를 한국어와 동등한 지위로 인정하는 ‘한국수화언어법’이 제정됐다.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농인을 위해 수어통역 마련 등 언어 환경을 개선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법이 만들어진 지 7년이 흘렀지만, 지자체 수어통역센터는 여전히 만성적인 인력 부족 문제를 앓고 있다. 이로 인해 농인과 코다 가족들은 소소한 일상마저 제대로 누릴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다빈씨는 병원에서 겪은 통역 난관을 회상했다. 어린 시절부터 병원에 가면 의사와 부모님 사이 통역을 도맡은 다빈씨는 “내가 잘못 통역해서 엄마가 진단을 제대로 못 받으면 어떡하지, 큰 병인데 모르고 지나치는 건 아닌가”하는 걱정에 사로잡혔다고 털어놨다.
두려운 마음에 의사 선생님을 붙잡고, 조금 더 쉽게 설명해줄 순 없는지 몇 번이나 되물어야 했다. 학교에서도 통역 지원이 없긴 마찬가지였다. 다빈씨는 한살 터울의 동생 이승헌(19)군의 대학 입시 상담도 대신 했다. 이 과정에서 다빈씨는 어린 시절 부모님이 청각 장애인이라는 사실이 못내 아쉽고, 싫을 때도 있었다고 고백했다.
◆“지금은 코다라서 행복”…농인 부모 덕분에 찾은 꿈
다빈씨의 고등학교 졸업식 날, 코다라는 사실이 새삼 행복한 순간으로 찾아왔다. 졸업식 며칠 전 담임선생님은 학부모들로부터 글이나 영상으로 편지를 받았다. 다빈씨는 당연히 어머니 김옥미씨가 글로 편지를 써주리라 예상했다. 그런데 졸업식 당일, 글로 된 편지 모음이 다 공개될 때까지 엄마의 편지가 나오질 않았다. 다빈씨는 ‘엄마가 깜박했나보다’ 하고 아쉬워했다.
그때였다. 영상편지로 화면이 전환되고, 김씨의 영상이 나오기 시작했다. 화면의 오른쪽에는 글로 쓴 편지가 있었고, 화면 왼쪽에선 김씨가 편지를 수어로 읽어주는 모습이 녹화돼있었다. 다빈씨는 눈물이 차올라 화장실로 뛰쳐 나가느라 막상 부모님의 편지를 놓쳤지만, 자리로 돌아온 그녀에게 친구들은 “야, 너 엄마랑 웃는 거 똑같더라!”라며 환호했다.
다빈씨는 이제 부모님이 농인이라서 감사하다. 부모님 덕분에 자연스럽게 수어를 배웠고, 어린 시절부터 수어 관련 봉사활동도 하면서 친구들도 사귈 수 있었다. 무엇보다 농인 통역사로서 다른 농인들의 일상을 돕는 어머니를 보며 다빈씨도 ‘장애 복지’ 관련 꿈을 꾸게 됐다.
다빈씨는 현재 대학에서 장애인 재활에 대해 공부하며 농인뿐 아니라 시청각장애 등 중복 장애인의 일상도 온전히 보장받을 수 있는 세상을 꿈꾸고 있다. 다빈씨는 “수어를 하면 농인들과 소통할 수 있고, 천천히 말하면 입모양을 보고 알아 듣는 농인도 많다”며 “농인의 소통을 어렵게 만드는 사회가 결국 ‘장애’를 만드는 것이다. 서로 조금만 배려해주면 장애도 특별한 것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농인도 청인도 아닌 ‘코다’만의 고유한 정체성
‘코다 정체성’을 받아들이며 새로운 세상을 만난 이가 또 있다. 바로 이현화 국립국어원 연구사다. 현화씨는 현재 수어의 발전과 보전을 위해 새로운 수어사전을 편찬하고 있다. 기존 사전이 농인의 실제 언어현실을 반영하지 못한 ‘반쪽짜리’라는 비판을 받으며, 새롭게 편찬되는 수어사전은 농인들의 다양한 발화에서 비롯한 세대별·지역별 말뭉치를 기반으로 제작된다.
새로운 수어사전은 12년짜리 중장기 프로젝트다. 수어를 한국어로 풀어서 설명하는 ‘한국수어→한국어 사전’과 한국어를 수어로 풀어서 설명하는 ‘한국어→한국수어 사전’ 두 가지 사전이 모두 영상으로 만들어지는 만큼, 현화씨의 일터는 숨 돌릴 틈도 없이 바쁘게 돌아간다. 당장 수요가 있는 수어 위주로 우선순위를 정해 내년도 1차 공개를 앞두고 있다. 1차 사전 편찬 마무리 작업에 매진하고 있는 현화씨의 얼굴엔 설렘과 긴장감이 감돌았다.
현화씨는 “농인 부모님 덕분에 자연스럽게 수어를 익혔고, 전문 수어통역사로 일하기도 했다”며 “내가 통역을 잘해서 한 개인의 삶에 도움이 된다면 다행이지만, 더 큰 틀인 정책적인 측면에서 도움이 되고 싶어 국립국어원에 들어와 수어사전 편찬을 맡게 됐다”고 말했다. ‘코다’로서의 삶이 현화씨를 이 자리로 이끌었다는 것이다.
물론 현화씨가 코다 정체성을 현재 긍정한다고, 코다로서의 삶이 안온했다는 것은 아니다. 유독 타인의 시선을 신경쓰게 되는 어린 시절만큼은 현화씨도 수어를 쓰는 부모님을 신기하다는 듯 쳐다보는 시선들로부터 도망가고 싶었다. 또 동사무소, 경찰서 등에서 부모님을 대신하여 어른들과 말을 주고 받을 때는 수많은 통역의 실패와 오류를 경험해야 했다.
현화씨는 “10대 때 통역은 결코 유쾌하지도 즐겁지도 않았다”고 회상했다. 현화씨의 친구들은 그녀를 대놓고 놀리지도 왕따를 시키지도 않았지만, ‘이방인’이 된 듯한 기분은 어린 현화씨를 짓눌러 위축시켰다. 현화씨는 “차별의 시선이란 것은 공기와도 같아서 온몸으로 느껴진다”고 담담히 고백했다.
이제 현화씨는 농인과 청인 사이에서 두 세계 사이를 잇는 코다로서 소리가 ‘들리는 것’과 ‘들리지 않는 것’은 모두 하나의 상태일 뿐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현화씨는 “농인들은 ‘소리가 들리지 않는 상태’가 자연스러운데, 청인들은 소리가 들리지 않는 걸 공포로 느낀다. 청인 중심 사회에서 소리가 들리지 않는 상태는 곧 ‘결함’이 된다”고 덧붙였다. 사회가 만들어낸 장벽과 시선이 ‘장애’를 불편한 것으로 만든다는 것이었다.
◆‘코다 코리아’, 아시아 최초 코다국제컨퍼런스 개최
현화씨는 코다들이 모여 만든 커뮤니티 ‘코다 코리아’ 활동을 통해 코다 정체성을 더욱 긍정하며, 코다로서 가질 수 있는 풍부한 잠재력을 찾아 나누고 있다. 현화씨는 “모든 코다가 같은 경험을 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코다 중에도 양친 모두가 농인인지, 형제자매 중 농인이 있는지, 수어를 할 수 있는지 등에 따라 다양한 정체성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또 이러한 가정 환경 외에도 코다는 인종, 민족·국적, 성적지향 및 성별정체성, 연령 등에 따라 다채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다.
현화씨는 다양한 코다들의 삶을 직접 보고, 이야기를 듣는 것은 ‘코다 정체성’을 긍정하는 데 아주 좋은 기회가 된다고 강조했다. 그도 지난 2017년 캐나다 밴쿠버에서 열린 코다 국제콘퍼런스에 참여한 뒤 코다로서의 삶에서 더 큰 행복을 찾았다고 했다. 현화씨는 “코다 정체성을 받아들이고 ‘여기가 내 나라구나’ 하는 소속감과 안도감을 처음으로 느꼈다”며 “농인과 청인 사이에서 어디에도 딱 들어맞는다고 느끼지 못했는데, 코다라는 고유한 정체성을 발견하면서 제 안에 설명되지 못한 부분들이 많이 해소됐다”며 미소를 띄었다.
그리고 올해 6월29일부터 7월2일까지 아시아 최초로 한국에서 코다국제컨퍼런스가 열린다. 여러 강연을 비롯해코다들이 서로의 다양한 정체성을 존중하며 교류하는 소그룹 모임도 열릴 예정이다. ‘코다 코리아’ 구성원들이 한국 개최를 위해 불철주야 노력한 결과다.
코다국제컨퍼런스에는 코다들만 참여가 가능하다. 현화씨는 “전 세계 코다들이 한자리에 모여 국경을 초월한 유대감을 쌓을 수 있는 기회”라며 “코다라면 꼭 와서 코다로서 새로운 경험과 환대를 나누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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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하지 못한 이야기>
⑧ 침묵과 소리의 경계… ‘소리 없이 빛나는’ 코다(CO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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⑨ 농인 수어통역사를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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⑩ 0.0007%의 기회…장애인·비장애인 ‘같이’ 관람하는 ‘가치봄’ 영화 관람해보니 [밀착취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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