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선거관리위원회 고위 간부들의 자녀 특혜 채용 의혹과 관련한 국회 국정조사에 동의한 여야는 조사 범위와 기간 등 구체적인 내용을 두고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 국민의힘은 북한 해킹 공격 관련 국가정보원 보안점검 거부 등 선관위를 둘러싼 논란을 종합적으로 들여다봐야 한다는 입장이고, 더불어민주당은 채용 비리에 한정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노태악 중앙선거관리위원장을 비롯한 선거관리위원 9명 전원이 검찰에 고발당했다.
4일 정치권에 따르면 여야 원내수석부대표는 5일 만나 국정조사 관련 협의를 하기로 했다. 앞서 이들은 지난 1일 두 차례에 걸쳐 회동하는 등 의견을 나눴지만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여야는 지난달 31일 관련 의혹에 대해 국정조사 관련 논의에 착수하기로 뜻을 모았다.
민주당 이소영 원내대변인은 세계일보와의 통화에서 “채용 비리와 관련한 국정조사는 찬성”이라면서도 “채용 비리 외에 다른 것을 함께 한다면 한도 끝도 없고, 빠르게 진행하기도 어렵다”고 말했다. 국민의힘 이양수 원내수석부대표는 “민주당에서 채용 비리만 하자고 정식으로 제안해 온 적이 없다”면서 “민주당 내에서 이견을 조정하겠다고 해 5일까지 (논의가) 미뤄진 상태”라고 했다.
다만 국정조사 필요성에 대해서는 양당 간 이견이 없는 만큼 국정조사 자체가 무산될 확률은 높지 않다. 조만간 여야가 각론에서 입장차를 좁히고 나면 오는 12일 국회 본회의에서 국정조사 계획안이 의결될 가능성도 있다.
국민의힘 김기현 대표는 4일 국회에서 열린 긴급 최고위원회의에서 선관위를 향해 “고위직부터 썩은 냄새가 진동하는데 여전히 문을 걸어 잠그고 폐쇄적 태도를 고집하며 국민의 요구를 외면하는 조직은 더 이상 민주주의 국가의 기관이라 할 수 없다”면서 감사원 감사 수용을 촉구했다. 선관위는 권익위 조사, 경찰 수사, 국회 국정조사에 대한 수용 입장을 밝혔지만 감사원의 직무감찰 대상이 아니라는 이유로 감사원 감사를 거부하고 있다.
국민의힘은 재차 노 위원장의 사퇴를 압박하며 선관위와 민주당이 공생적 동업관계라고 공격했다. 윤재옥 원내대표는 “노 위원장이 자리를 지키는 한 국민의 분노와 청년 세대의 상처는 치유될 수 없을 것”이라고 일갈했다. 김 대표는 “노 위원장의 사퇴 촉구와 감사원 감사 요구에 대해 민주당은 ‘독립기관 흔들기’라며 선관위를 두둔하고 있다”며 “선관위 고위직들이 겁도 없이 과감하게 고용 세습을 저지를 수 있었던 이유가 민주당과 공생적 동업관계를 형성했기 때문은 아닌지 의심이 든다”고 했다.
국민의힘 이종배 서울시의원은 이날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감사원법 위반 혐의로 선관위원장과 위원 전원을 고발했다”고 밝혔다. 감사원법은 감사 대상자가 감사를 거부하거나 자료제출을 거부하면 1년 이하 징역 또는 1000만원 이하 벌금에 처하도록 규정했다.
민주당은 선관위에 대한 국민의힘의 전방위적 공세에 정치적 의도가 깔렸다고 보고 있다. 한 민주당 지도부 인사는 “총선을 앞둔 상황에서 사실상 노태악 (선관위원장) 길들이기”라면서 “감사원 감사의 객관성을 보증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소속 민주당 의원들도 이날 입장문을 통해 “국민의힘의 선관위원장 사퇴와 윤석열 정부의 입맛대로 움직이는 감사원의 감사를 받으라는 요구는 선관위를 장악하고자 하는 정치적 목적을 명백히 밝힌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고 비판했다.
한편 조직 내 ‘투톱’인 사무총장과 사무차장이 이번 의혹으로 모두 사퇴하는 초유의 사태를 맞은 선관위는 조직 추스르기에 속도를 내고 있다. 35년 만에 외부에도 개방하기로 한 사무총장 임명에는 시간이 걸리는 만큼, 총장 역할을 대행할 수 있는 차장 자리를 빠르게 채워 수뇌부 공백을 메우겠다는 의도다. 노 위원장과 선관위원들은 조만간 차장 후보자를 대상으로 서면·면접 검증절차를 거쳐 오는 9일 사무차장 임용안을 의결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