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작가만을 위해 지어진 미술관은 작품을 전시하는 역할뿐 아니라 건축물 자체가 작가의 작품세계를 상징하기도 한다. 전국 258개 미술관 중 50여개 미술관 이름에 작가의 이름이 들어가 있다. 다섯 개 미술관 중 하나는 작가의 기념관 역할도 하는 셈이다(‘2022 전국 문화기반기설 총람’, 문화체육관광부 자료 기준). 그중 환기미술관은 전남 진도에 있는 장전미술관 다음으로 이른 시기(1993년 7월21일)에 등록됐다.
김환기(1913~1974)는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이자 대가다. 그의 예술세계를 연구하고 전시하며 국내외 예술가들을 격려·지원하기 위한 목적으로 1989년에 환기재단이 설립됐다. 그리고 3년 후 환기미술관이 개관했다. 환기미술관 개관 소식을 접했을 때 사람들은 부암동이라는 위치를 의아하게 생각했다. 지금이야 많은 사람들이 안온한 분위기의 카페와 한적한 산책을 위해 부암동을 찾지만 당시만 해도 북악산 북서 사면에 있는 조용한 주거지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사람들이 쉽게 찾아갈 수 있는 위치는 아니다.
결론부터 얘기하면 김환기와 부암동 간의 직접적인 관계는 없다. 김환기는 전남 신안에서 태어났고 일본대학 예술과 미술부를 졸업한 뒤로는 주로 서울, 파리, 뉴욕에서 활동했다. 서울에 마련한 집과 화실도 성북동에 있었다. 환기미술관 관장에 따르면 부암동의 자연환경이 김환기 부부가 애착했던 성북동과 비슷해서 현재 자리에 들어섰다고 한다.
환기미술관의 조형은 무언가를 강렬하게 상징하거나 주변 건물 또는 자연환경을 압도하지 않는다. 심지어 미술관의 주출입구조차 뚜렷하지 않다. 별관 옆으로 난 계단을 오르면 본관이 보인다. 본관은 상설전시실이 있는 북쪽 부분과 본관 입구가 있는 남쪽 부분으로 나뉘어 있는데, 두 부분은 살짝 틀어져 있다. 이 중 규모가 더 큰 북쪽 부분은 정면이 아닌 모서리가 보인다. 반면, 정면이 보이는 남쪽 부분은 입구에서 멀어질수록 건물이 높아지면서 후퇴돼 있다. 진입 방향을 기준으로 건물을 틀거나 잘게 잘라 높이를 다르게 만든 이유는 주변 건물에 비해 크기가 큰 본관이 압도적으로 느껴지지 않고 어울려 보이도록 하기 위해서다.
내부 공간은 김환기의 1935년작 <집>을 떠오르게 한다. 특히, 정사각형 평면에 우물 ‘井’ 자 형태로 구성된 천장 보와 그 가운데 동그란 천창이 있는 갤러리2는 그 자체가 김환기의 작품 같다. 추상화된 기하학으로 설계된 미술관 내부는 자잘하고 다닥다닥한 미술관 주변 건물들과 대조를 이루어 더 추상적으로 다가온다. 그래서 관람을 마치고 미술관 밖으로 나오는 과정이 마치 김환기의 작품세계를 이루는 심연을 들여다보다 현실 세계로 돌아오는 것 같다.
미술관 출구는 갤러리2의 옥상 마당으로 연결된다. 환기미술관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옥상 마당에서 1층으로 내려오는 경로는 본관을 가운데 두고 세 갈래다. 기능적으로만 생각하면 굳이 여러 개의 경로를 만들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관람객이 경로를 선택함으로써 마치 부암동 골목을 산책하듯 본관을 둘러싼 계단을 오르내리며 천천히 소요할 수 있다. 우규승은 작품을 감상하는 중간중간에 미술관 주변의 자연과 도시를 느낄 수 있는 장치를 적절히 삽입하여 미술관 전체 체험이 풍부해지도록 했다. 그는 작품감상과 건축이 미술관의 전체 경험을 상호 보완해 준다고 생각했다.
이 부분이 많은 건축가들이 환기미술관에서 전통 공간을 떠올리는 이유다. 어떤 건축가는 환기미술관이 작은 산사(山寺)에 이르는 느낌을 준다고 했고 다른 건축가는 미술관의 풍경이 땅의 박력을, 건축물이 소박한 전통 가옥의 편안한 풍모를 자아낸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런 미술관의 자세가 한국성의 구현을 평생 동안 고민해 온 김환기의 삶을 닮았다고 평가했다.
그런데 환기미술관도 지어진 지 30년이 넘었다. 그러니 전통 공간을 통해 환기미술관을 설명하는 비유도 지금을 사는 누군가에게는 공감하기 어려운 이야기일 수 있다. 그럼에도 주목해야 하는 건 미술관이 들어선 동네와 어울리도록 한 건축가의 노력이다. 더군다나 부암동의 모습은 저층 주택이 자연발생적으로 들어선 우리네 흔한 동네 풍경이다.
흔한 동네의 모습을 존중하고 이를 바탕으로 미술관을 설계한 우규승의 시도는 프랑스 유학 당시 서양화법을 활용하면서도 자신이 고민한 ‘한국성’을 지키고자 했던 김환기의 의지와 유사하다. 미술사학자 최순우에 따르면 프랑스로 유학을 떠난 김환기는 현지 작가들의 그림에 물들지 않으려고 첫 번째 개인전을 열기 전까지 전시회도 구경하지 않았다고 한다.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보든 그리고 그것이 너무 흔해서 주목받지 못한다 하더라도 자신이 지닌 정체성에서 시작하려는 시도는 우규승과 김환기의 공통점이었다. 둘은 과거부터 이어져 현재 삶의 바탕이 되는 평범함을 다른 시선으로 보고자 했다. 그리고 그 시선을 건축과 회화를 통해 우리에게 전하고자 했다. 그래서 우규승이 설계한 환기미술관은 김환기를 닮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