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하이밍(邢海明) 주한 중국대사가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회동에서 한국 정부에 대한 불만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데 대해 외교부가 초치해 항의했지만 논란은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11일 여당 내에서는 싱 대사를 ’외교적 기피인물’(페르소나 논 그라타)로 지정하고 사과하지 않을 경우 추방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왔다.
싱 대사가 선을 넘는 발언으로 ’내정간섭’ 논란을 부른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싱 대사는 지난해 10월 관훈클럽 초청토론회에서도 한중관계가 큰 고비를 맞았다며 “가장 큰 외부요인은 미국”이라고 말하고, 지난달 MBC 라디오에서도 “한중관계가 더 나빠질 위험을 우려한다”고 밝히는 등 양국 관계에 대해 다소 과격한 발언을 이어왔다.
◆거침없는 언사로 여러차례 ‘구설’
싱 대사는 1964년생 톈진(天津) 출신이다. 그는 중국 정부의 한반도 전문가 양성 프로그램을 통해 북한 ‘사리원 농업대학’에서 유학했다. 그럼에도 북한 억양 없이 유창한 ’남한 표준어’를 구사하는 이유는 그가 유학 시절 한국 라디오 프로그램을 들으며 한국어를 배웠기 때문으로 알려져 있다.
싱 대사는 1986년 국무원 외교부에 입부해 1988∼1991년 주북한 대사관에서 근무했다. 한중 수교 직후인 1992년부터 3년간은 주한국 대사관 3등 서기관으로 부임했다. 이후에도 그는 남북한 대사관을 수차례 오가며 경력을 쌓았고 중국 외교부 내 ‘한반도통’으로 자리매김했다.
2020년 1월, 싱대사는 제8대 주한국중화인민공화국 특명전권대사로 한국에 부임했다. 전임자들과 달리 한반도 전문가가 부임한다는 소식에 국내에서는 대체로 환영했지만, 그가 이전 한국 근무 시절부터 보였던 거친 언행 때문에 우려하는 시선도 있었다.
싱 대사는 두번째 한국 근무 시절인 2004년 5월, 독립론자인 대만 천수이볜(陳水扁) 총통 취임식에 참석하려던 여야 국회의원에게 전화해 “참석하지 말라”고 종용했다가 논란에 휩싸인 바 있다. 세번째 한국 근무 시절인 2010년 5월에는 현인택 통일부 장관과 장신썬(張鑫森) 주한중국대사의 면담에 통역관으로 배석했다가 현 전 장관이 천안함 폭침 사건에 대해 “중국의 책임있는 자세”를 요구하자 “이거 너무 심한 것 아닙니까”라며 끼어드는 무례를 범하기도 했다.
대사로 정식 부임한 뒤 그는 각종 공식·비공식 행사에 참석해 거침없는 발언을 이어갔다. 중국에서 시작된 코로나19(신종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 전 세계적으로 중국인 입국 금지 조치가 확대되는 가운데 한국에서도 이런 움직임이 보이자 그는 “WHO(세계보건기구)의 권고를 따라야 한다”며 우회적으로 불만을 드러냈다.
그는 2021년 4월 취임 1주년을 맞아 당시 대표적 친여 성향 방송이었던 TBS ‘김어준의 뉴스공장’에 출연했다. 방송에서 싱 대사는 미중관계 악화는 미국의 책임이라고 지적하고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에 중국이 위협을 받았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지난해 대선을 앞두고는 ‘대선 개입’ 논란을 빚기도 했다. 당시 국민의힘 대선 후보였던 윤석열 대통령이 “공고한 한미동맹의 기본 위에서 가치를 함께 공유하는 국가들과 협력 관계를 강화해야 한다”, “(사드 체계 배치는) 명백히 우리 주권적 영역이며 (중국이) 사드 배치 철회를 주장하려면 자국 국경 인근에 배치한 장거리 레이더를 먼저 철수해야 한다”고 밝힌 인터뷰가 나오자 다음날 기고문을 통해 ‘반론’을 제기한 것이다.
그는 ‘한중 관계는 한미 관계의 부속품이 아니다’라는 제목의 기고문에서 “한미동맹이 중국의 이익을 해쳐선 안 된다. 미국이 한국에 사드를 배치한 것은 중국의 안보 이익을 심각하게 훼손했다”고 주장했다. 이어 “천하의 대세는 따라야 창성하다는 말이 있다”며 중국이 대세라는 뜻을 피력했다.
당시 한국 외교부는 “주재국 정치인의 발언에 대한 외국 공관의 공개적 입장 표명은 양국 관계 발전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신중할 필요가 있다”는 뜻을 주한중국대사관 측에 전달했다.
◆외교부 싱 대사 초치에 中 ‘맞불’
윤석열 정부가 한미일 안보공조 강화에 주력하자 중국은 기회가 될 때마다 불만을 표하고 있다. 언론 인터뷰와 외부 토론회 등을 통해 미국을 비판하던 싱 대사는 최근 이재명 대표와 만나서는 한층 더 직접적으로 한국 정부에 메시지를 전했다.
싱 대사는 8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만난 자리에서 “중국 정부는 항상 한국과의 관계를 매우 중시하지만, 현재 관계가 많은 어려움에 부딪혀 가슴이 아프다”며 “그 책임은 중국에 있지 않다“고 말했다. 이어 “미국이 전력으로 중국을 압박하는 상황 속에 일각에선 미국이 승리하고 중국이 패배할 것이라는 데 베팅을 하고 있다”며 “이는 분명히 잘못된 판단이다. 단언할 수 있는 것은 현재 중국의 패배에 베팅하는 이들이 나중에 반드시 후회한다는 점”이라고 강조했다.
야당 대표와 만나 인터넷으로 생중계되는 방송에서 주재국 정부를 대놓고 비판한 것은 “도를 넘었다”는 지적이 여당과 외교부에서 제기됐다. 박진 외교부 장관도 “대사의 역할은 우호를 증진하는 것이지 오해를 확산하면 안 된다“고 밝혔다.
장호진 외교부 1차관은 9일 오전 종로구 외교부 청사로 싱 대사를 불러 “사실과 다른 내용과 묵과할 수 없는 표현으로 우리 정책을 비판한 것은 외교사절의 우호 관계 증진 임무를 규정한 ‘비엔나 협약’과 외교 관례에 어긋난다”고 지적하며 “우리 국내 정치에 개입하는 내정간섭에 해당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러자 중국 외교부가 11일 정재호 주중대사를 불러 “싱하이밍 대사가 한국 각계 인사들과 접촉하고 교류하는 것은 그의 업무”라고 설명하며 “한국 측이 현재 중한 관계의 문제점이 어디에 있는지 되돌아보고 진지하게 대하길 바란다”고 재차 한국 정부를 탓했다. 갈등을 봉합하는 대신 ‘맞불’을 놓은 것이다.
싱 대사의 발언이 잇따라 문제를 일으키자 정치권에서는 그를 추방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
국민의힘 신원식 의원은 이날 페이스북에서 싱 대사에 공개 사과를 요구하고 거부할 경우 ‘외교적 기피인물’(페르소나 논 그라타)로 지정하해 지체 없이 추방해야 한다면서 “추방이야말로 대한민국의 국격과 자존을 바로 세우고 ‘상호존중에 기초한 건전하고 당당한 한중관계’를 다지는 초석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