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차익 안누리면 손해”… 여행·예금·주식 ‘바이재팬(Buy Japan)’ 열풍 [뉴스 투데이]

역대급 엔저에… 이젠 ‘예스재팬’

“동남아보다 이득” 日여행 35%↑
개미 투자자들 日주식 매수 활발
엔화 예수금·평가액 4조원 넘어

‘불매 타깃’ 현지 유니클로 등 호황
“노선 만석” 항공업계는 증편 분주

日 “경제 아직 불확실” 돈풀기 고수
‘100엔=800원대’ 전망까지 나와

최근 원화에 대한 엔화 가치가 사상 최저 수준으로 떨어지면서 이른바 ‘예스재팬(YesJapan)’ 현상이 가속화하고 있다. 여름 휴가철과 맞물려 일본 여행이 크게 늘고 환차익을 내기 위한 엔화 수요가 급증하면서다. 2019년 일본 상품 불매 운동인 ‘노재팬(NoJapan)’ 여파로 자취를 감춘 일본 상품과 일본 주식 투자 인기까지 되살아나고 있다. 엔저 현상이 계속되면서 ‘바이재팬(BuyJapan)’ 추세는 한동안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18일 금융권에 따르면 16일 원·엔 재정환율(오후 3시30분 하나은행 고시 기준)은 전날 대비 2.38원 하락한 100엔당 903.82원을 기록하며 연 최저치를 경신했다. 2015년 6월 이후 8년 만에 가장 낮은 수준이다.

 

“쌀 때 사두자” 18일 서울 명동의 한 환전소에서 외국인 관광객들이 환전을 하고 있다. 원·엔 환율은 16일 기준으로 100엔당 903.82원을 기록하며 880원대까지 떨어졌던 2015년 6월 이후 약 8년 만에 최저 수준으로 하락했다.
뉴시스

지난해 초 ‘100엔=1000원’ 수준이던 원·엔 환율은 최근 900원선까지 내려앉았다. 작년에 100엔을 사려면 1000원이 필요했는데, 이제는 900원 정도면 살 수 있다. 그만큼 원화 가치는 오르고 엔화 가치는 하락했다. 원·엔 재정환율은 6월 들어서만 951.09원(5월31일 종가)에서 47.27원 하락했다.



엔화가 약세를 보이자 일본을 찾는 관광객도 급증하고 있다.

항공통계에 따르면 이달 1∼10일 8만9847명이 국내 항공사의 인천∼나리타(도쿄) 노선을 이용한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 1월(6만6741명) 대비 34.6% 늘었다. 지난 5월 초 가족 여행으로 일본 오사카를 다녀온 이모씨는 “한국의 고물가 영향 탓에 일본 먹거리를 즐기는 데 큰 부담이 없었다”며 “가족들이 한 번 더 일본을 가자고 해서 내년에 홋카이도 여행을 생각하고 있다”고 전했다.

 

원·엔 환율은 최근 들어 하락 폭·속도가 빨라지면서 어느덧 ‘100엔=800원대’가 현실화할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일본을 찾는 여행객은 더욱 늘어날 전망이다.

 

올여름 휴가를 일본 후쿠오카에서 보내기로 한 30대 박모씨는 “엔화 가치가 너무 떨어져서 지금 가지 않으면 오히려 손해라는 말을 들었다”며 “물가가 낮은 동남아와 비교해 봐도 일본을 가는 게 이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는 여행을 결정하고 나서도 계속해서 엔화 환율이 떨어져 여러 번에 걸쳐 여행 비용을 환전 중이라고 했다. 박씨는 “970원대에서 950원대로 떨어졌을 때 절반 정도 환전을 했는데 지금은 920원대까지 떨어졌다”며 “여행 비용 외에도 엔테크(엔화+재테크)를 해야 할지 고민 중”이라고 말했다.

 

최근 일본 유명 관광지인 도쿄 인근 가나가와(神奈川)현 후지사와(藤澤)시 에노시마를 방문했던 50대 임모씨는 “지역의 대표적인 먹거리인 잔멸치덮밥 종류도 가장 비싼 것이 1250엔(약 1만1300원)밖에 하지 않았다”며 “한국 물가가 많이 오른 것에 비해 일본 엔화 가치는 많이 떨어져 한국보다 전체적으로 일본 물가가 싸다는 느낌이 들어 일본 여행을 자주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원·엔 환율의 급격한 변동으로 환차익을 노린 엔화 수요도 급증하고 있다.

 

금융권에 따르면 4대 시중은행(KB국민·신한·하나·우리)의 5월 엔화 매도액(원화를 엔화로 바꿔준 규모)은 301억6700만엔(약 2732억원)으로 전월(228억3900만엔)보다 32.1% 증가했다. 지난해 같은 달(62억8500만엔)에 비해서는 5배 가까이 급등했다.

 

원화에서 엔화로 환전하는 건수는 더욱 큰 폭으로 늘고 있다. 엔화 환전액이 가장 큰 한 시중은행의 5월 환전 건수는 14만1743건으로 전월(7만8643건) 대비 2배가량 늘었다. 지난해 같은 달(1만8041건)과 비교하면 약 8배에 이른다.

 

엔화 예금도 보름 사이 1조원 넘게 불었다. 지난달 말 6978억5900만엔이었던 엔화 예금은 이달 15일 기준 8109억7400만엔으로 16% 급증했다. 우리 돈으로 1조243억원에 달하는 금액이다.

 

일본에 유학생 자녀를 둔 부모들의 표정은 밝다.

 

일본에 유학 중인 자녀에게 해마다 400만엔 정도를 송금하는 50대 김모씨는 “지난해 1월 50만엔을 송금하려면 약 530만7000원이 필요했는데 지금은 457만6000원이면 가능해 73만1000원이나 절약할 수 있다”며 “이참에 엔화 가치가 다시 오를 것에 대비해 미리 100만엔 정도 환전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국내 투자자들은 역대급 엔저 현상에다 일본 증시도 지속적으로 상승하자 일본 주식 투자에 나서고 있다.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자본총계 기준 상위 8개 주요 증권사(미래에셋·한국투자·NH투자·삼성·하나·KB·메리츠·신한투자증권)에 예치된 엔화예수금 및 일본 주식 평가금액은 15일 기준 총 4조946억2000만원으로 나타났다. 1년 전인 지난해 6월 말(3조1916억원)보다 9000억원 이상(28.3%), 지난 1월 말(3조4924억5000만원)과 비교하면 6000억원 이상(17.2%) 증가한 수치다. 예탁결제원에 따르면 지난달 국내 투자자들이 일본 주식을 순매수한 규모는 총 3441만7000달러이며, 이달엔 15일까지 1851만3600달러를 순매수했다. 두 달간 순매수 규모 합계(약 5293만1000달러)를 원화로 환산하면 674억원 수준으로 앞선 2년치(2021년 4월∼올해 4월) 순매수 규모(약 401억원)보다 많다.

 

일본 현지 상품의 인기도 높아지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SPA 의류 브랜드 유니클로다. 국내에서는 2019년 ‘노재팬’의 주요 타깃으로 타격을 입었던 유니클로는 최근 엔저로 다시 호황을 맞았다. 엔저 덕분에 같은 물건이라도 한국에서 구매하는 것보다 가격이 저렴하고 물건도 다양하다. 이 때문에 일본 여행을 갔을 때 빠지지 않고 들르는 필수 쇼핑 코스가 됐다.

 

원/엔화 환율이 약 8년 만에 최저치 수준으로 떨어진 가운데 18일 인천국제공항 제1여객터미널 출국장에 설치된 비행 스케줄 스크린에 일본행 항공편 정보가 띄워져 있다. 연합뉴스

항공업계는 일본 여행 수요 증가에 맞춰 신규 노선을 취항하거나 기존 노선을 증편하고 있다.

 

제주항공은 22일부터 일본 규슈 지방의 오이타 노선을 단독으로 취항하는 데 이어 다음달 13일부터 인천∼히로시마 노선의 운항을 시작한다. 진에어는 다음달 17일부터 9월10일까지 부산∼삿포로, 부산∼후쿠오카 노선을 주 7회 일정으로 재개한다. 항공사 관계자는 “최근 엔저 현상으로 일본을 찾는 여행객이 크게 늘면서 지난달부터 일본 대부분 노선의 예약률이 80∼90%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면서 “저비용항공사(LCC)들의 경우 중국 대신 일본 노선을 주로 늘리면서 이벤트도 많고, 항공권 가격도 예전보다 저렴해진 상황”이라고 전했다.

 

역대급 엔저의 원인으로는 일본의 금융완화 정책이 꼽힌다.

 

일본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이후 기준금리를 대폭 인상하는 등 긴축 기조를 이어가는 미국·유럽과 반대되는 행보를 유지 중이다. NHK방송은 일본은행이 16일 금융정책결정회의를 열고 대규모 금융완화 정책을 유지하기로 했다고 보도했다. 일본은행은 이날 단기금리를 -0.1%로 동결하고 장기금리 지표인 10년물 국채금리도 0%대로 유지했다. 지난 4월 취임한 우에다 가즈오 일본은행 총재는 양적완화 정책(중앙은행이 시중에 돈을 푸는 것)을 고수하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여러 차례 언급했다.

 

우에다 총재는 이날 회의 후 기자회견에서 “경제 전망은 여전히 불확실성이 높고, 2% 물가 목표의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달성에는 아직 시간이 걸린다. 끈질기게 금융완화를 지속할 것”이라고 재차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