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희창칼럼] 갈 길 먼 교육개혁

대통령 ‘쉬운 수능’ 발언 현장 혼란
잇단 헛발질, 개혁 동력 상실 우려
사교육비 경감 대책은 차일피일
국민이 체감하는 정책 우선해야

지난해 7월 교육부 업무보고를 받은 윤석열 대통령은 “초·중·고 12학년제를 유지하되 취학 연령을 1년 앞당기는 방안을 신속히 강구하라”고 지시했다. 휘발성이 큰 사안인 데다, 집권 초 대통령의 발언에 힘이 실려 만 5세 초등학교 입학은 ‘핫 이슈’가 됐다. 하지만 사전 의견 수렴 절차가 없었던 탓에 교육계와 학부모의 거센 저항에 직면했다. 결국 박순애 교육부 장관은 취임 35일 만에 책임을 지고 사퇴했다. ‘설익은’ 정책 발표로 교육개혁은 출발부터 휘청거렸다.

윤 대통령이 지난주 교육개혁 추진 방향을 보고받는 자리에서 ‘수능 난도를 낮추라’는 취지의 지시를 해 파장이 크다. ‘킬러 문항(초고난도 문항)’을 지적하며 “수능을 이렇게 어렵게 내면 무조건 사교육에 의존하라는 건데 교육 당국과 사교육산업이 카르텔이냐”며 이주호 교육부총리를 질타해서다. 6월 모의평가 난도를 조절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교육부 담당 국장은 경질됐고,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은 감사를 받는다. 서슬 퍼런 조치다.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을 불과 5개월 앞두고 수험생과 학부모들은 혼란에 빠졌다. 학원가는 ‘물수능’ ‘불수능’ 논란으로 시끄럽다.

채희창 수석논설위원

수능을 공교육 범위 내에서 출제해 학생들을 사교육시장으로 내몰지 말자는 윤 대통령의 말은 원론적으로 맞다. 하지만 현실이 과연 그런가. 그간 수능 난이도 조절에 실패해 혼란을 겪은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다. 2019학년도 수능 당시 만유인력을 다룬 국어 문제는 교사들도 풀기 어려워 한국교육과정평가원장이 사과까지 했다. 수험생들은 실수로 운명이 갈리는 물수능도 공포스러워 한다. ‘변별력은 갖추되 공교육에서 다루지 않는 분야는 수능 출제에서 배제’는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만 5세 입학 때처럼 이번에도 대통령 발언이 불쑥 나온 건 부적절하다. 대통령이 수능 출제 방향을 언급한 건 전례가 없는 일이다. 대통령이 만기친람식으로 모든 분야를 다 챙기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특히 ‘말 많고 탈 많은’ 입시·교육 문제에 대한 발언은 신중해야 한다. 대통령 지시를 정제하지 않고 공개한 이 부총리의 정무 감각도 무척 실망스럽다. 교육부 수장을 두 번째 맡고 있는데 이런 파장을 예상하지 못했다는 게 말이 되나.

사교육 문제 해결의 출발점으로 수능 개선을 거론한 대통령의 문제의식은 옳다. 우리 사회의 사교육 의존은 심각하다. 지난해 초·중·고생 사교육비 총액은 26조원으로 사상 최고치였다. 고교 1·2학년생의 월평균 사교육비(참여 학생 기준)는 70만원이 넘었다. 실제 사교육비 지출은 정부 통계보다 훨씬 높다. 사교육비 증가는 여러 사회 문제를 야기한다. 부모의 경제력에 따른 학력 격차 확대로 불공정이 심화하고, 출산 기피의 주요 원인이기도 하다.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2009년 방과후학교에 교과 교육을 포함하고 2010년 EBS 교재의 수능 연계율을 70%로 올리는 등 사교육 경감 대책을 적극 추진하자 사교육비가 5년 연속 감소했다. 정부가 강한 의지를 갖고 추진하면 성과를 낼 수 있다는 얘기다. 그런데 이후 정부가 사교육비 경감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자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교육정책이 정권 교체 때마다 오락가락해선 안 되는 이유다.

교육개혁은 노동·연금 개혁과 함께 윤석열정부가 내세운 3대 개혁 과제다. 현 정부 출범 이후 교육개혁은 노동·연금 개혁에 비해 진척이 더디다. 교육 현장에선 “정부가 공교육 정상화를 어떻게 하겠다는 건지 모르겠다”는 불만이 많다. 핵심 정책인 사교육비 경감 대책은 차일피일 미뤄졌다. 디지털교육 혁신, 국가책임 교육·돌봄, 대학 개혁도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이 부총리가 이곳저곳 눈치를 보느라 추진력이 떨어지는 것 아닌가.

교육개혁은 난제 중의 난제로 꼽힌다. 역대 정부들도 공교육 정상화를 기치로 내걸고 수시로 제도를 바꿨지만 공염불에 그쳤다. 정부는 교육철학을 분명하게 제시해야 한다. 그리고 국민이 원하고 체감할 수 있는 정책을 우선해야 한다. 선택과 집중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헛발질로 위기를 자초하고 교육개혁 동력마저 떨어뜨리는 우를 더 이상 범해선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