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에서 두 번째 소설을 출간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그의 책들은 서점의 서가에 덩그러니 꽂혀 있었다. 마치 “동네 야구에 출장을 기다리는 후보 선수 아이처럼”. 이미 포르투갈을 배경으로 한 다른 이야기를 진척 중이었지만, 그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인도 뭄바이로 날아갔다. 그의 두 번째 인도 여행. 휴양지의 널찍한 베란다에 놓인 테이블에서 소설을 쓰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했다.
보조금까지 받은 소설은 생각대로 나아가지 않았다. 남부 인도를 여행했다. 이때 과거 프랑스령 인도의 수도였던 퐁디셰리(Pondicherry)를 가게 됐다. 어느 날 퐁디셰리의 인디언 커피하우스에서 눈이 반짝이는 활기찬 백발의 노신사를 만났다. 프랜시스 아디루바사미였다. 내 이야기를 들으면 젊은이는 신을 믿게 될 거요. 프랜시스는 그에게 이렇게 말하며 소설 『파이 이야기(Life of Pi)』의 힌트를 준 것으로, 얀 마텔(Yann Martel)은 「작가 노트」에 적었다.
“「작가 노트」를 보시면, 프랜시스 아디루바사미라는 인물의 이름이 나오는데, 실제 퐁디셰리에서 그런 이름을 가진 분을 만났고, 그분이 저에게 차를 마시자고 초대를 해 주셨으며, 15~20분 정도 동안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하지만 진실은 조금 달랐다. 프랜시스는 실제로 신을 믿게 될 이야기를 그에게 해 주지도, 『파이 이야기』의 힌트를 준 것도 아니었다고, 그는 인터뷰에서 밝혔다.
“그분이 신을 믿게 할 만한 스토리가 있다고 저에게 말을 한 적은 없습니다. 그 말은 제가 지어서 넣은 말이고, 그분이 친절하고 자상하게 대해 주셨지요. 굉장히 오픈된 태도를 가지고 저를 대해 주셔서 기억에 남았고, 그래서 그분 이름을 소설에 언급하게 된 겁니다.”
비록 프랜시스가 직접적으로 『파이 이야기』를 들려준 건 아니었음에도, 그를 비롯한 인도인들과 그들의 종교가 외부 세계에 대해서 보여준 개방성이 결정적인 영감을 주었다고, 얀 마텔은 강조했다. 개방성은 신적인 존재나 종교, 동물에 대한 관심으로. 그리하여 일 년 반 정도 초고를 썼고, 이후 여러 번 다시 고쳐서 완성할 수 있었다.
2002년 부커상 수상작 『파이 이야기』(공경희 역, 작가정신)는 인도 소년 파이와 벵골 호랑이가 망망대해 태평양에서 생존하기 위해서 227일 동안 펼치는 놀라운 투쟁과 연대의 표류기다. 퐁디셰리에서 동물원을 운영하는 집안의 아들 파이는 힌두교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기독교와 이슬람교를 모두 수용하는 열린 소년이다. 파이와 가족들은 동물원을 처분하고 일본 화물선을 타고 캐나다로 향하게 된다. 하지만 태평양 한가운데에서 폭풍우를 만나 화물선은 난파하고 파이와 다리 다친 얼룩말과 오랑우탄, 하이에나, 그리고 벵골 호랑이만 구명보트에 승선한다. 파이는 구명보트 안에서 동물들끼리 먹고 먹히는 싸움이 벌어진 뒤 벵골 호랑이 ‘리처드 파커’와 단 둘이 살아남게 된다. 슬픔과 고통, 그리고 짙은 두려움과 함께.
“마음 한편으로 리처드 파커가 있어 다행스러웠다. 마음 한편으로는 리처드 파커가 죽는 걸 바라지 않았다. 그가 죽으면 절망을 껴안은 채 나 혼자 남겨질 테니까. 절망은 호랑이보다 훨씬 무서운 것이 아닌가. 내가 아직도 살 의지를 갖고 있다면, 그것은 리처드 파커 덕분이었다. 그 때문에 나는 가족과 비극적인 처지에 대해 많이 생각하지 못했다. 그는 나를 계속 살아 있게 해주었다. 그런 그가 밉지만 동시에 고마웠다. 지금도 고맙다. 이것은 분명한 진실이다. 리처드 파커가 없다면, 난 오늘날 이렇게 살아 여러분에게 내 이야기를 들려주지 못했을 것이다.”(241쪽)
7개월 뒤, 일본 운수성 퇴직 관리는 전말을 파악하기 위해서 살아남은 파이를 인터뷰하러 왔다가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듣게 되는데⋯. 작품은 세계 50개국에 출간돼 누적 판매 1200만부를 기록한 부커상 최고의 베스트셀러가 됐다. 특히 2012년 세계적 작가 이안 감독에 의해 아카데미상 4개 부문을 석권한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로도 만들어졌다.
소설 『파이 이야기』는 도대체 어떤 영감을 바탕으로 세상에 나오게 된 것일까. 그의 작가적 여로는 어디로 향해 갈까. 서울국제도서전의 초청작가로 방한한 얀 마텔을 지난 13일 주한캐나다대사관에서 기자간담회로 만났다.
―소설이 태어나게 된 계기나 영감에 대해서 좀더 설명해 달라.
“(외교관 출신의) 부모는 종교 대신 예술이나 다른 것들을 통해서 인생을 이해해야 된다고 가르쳐주셨다. 캐나다에선 종교적인 활동 같은 것도 전혀 하지 않았다. 인도 여행을 했던 당시, 저는 다른 소설을 쓰고 있었다. 하지만 잘 풀리지 않았다. 그래서 제 앞에 있는 게 무엇인가 하고 봤다. 예전에 등한시했던 종교나 신적인 존재, 동물 등이 굉장히 와 닿았다. 물론 기독교에도 닭이 세 번 울었다든가 예수가 당나귀를 탔다든가 하는 등 동물이 약간씩 등장하긴 하지만, 아주 미미했다. 하지만 힌두교에선 동물들이 굉장히 많이 나온다. 어떻게 보면 인간은 신적인 존재와 동물 사이에 만나는 접점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제가 만난 인도 사람들은 굉장히 오픈돼 있었고, 친절하게 대해줬다. 외부 세계로부터 협박이나 압박감 같은 것을 전혀 느끼지 않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종교적으로 배타적이지 않고 많은 것을 수용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말 그대로 개방감을 느끼게 됐다. 이것이 『파이 이야기』의 영감이 됐다. 만약 스위스 같은 나라를 여행했다면, 그런 경험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 사람이나 한 가지에 의해서 나온 스토리가 아니다. 여러 사람, 여러 요소들이 모여서 나온 이야기이다. 합금을 만들 듯.”
그는 이 대목에서 인도 여행을 하면서 신앙과 종교, 특히 힌두교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설명을 덧붙였다.
“자연스럽게 신념이나 종교적 믿음, 신적인 존재에 관심을 갖게 됐다. 테크놀로지가 지배하고 있는 세계에서 왜 아직까지 사람들이 신들을 믿고 있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물론 신을 믿는다든가 종교라는 것 중에도 나쁜 것이 있지만, 모든 종교가 다 나치당 같은 것은 아니다. 굉장히 다양한 종교들이 있고, 힌두교도 그렇지만, 부정적인 점들도 많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일단 접어두고 긍정적인 것을 찾아보게 됐다. 종교적인 사고를 한다는 것은 인생에 대해 깊이 파고들면서 생각하는 것이다. 기독교는 기독교만이 진실이라고 얘기하고 그 외의 것들은 다 거짓이다, 이런 식으로 얘기를 하는 등 배타적이지만, 힌두교에선 말 그대로 수천수만 개의 신들이 존재하고 있고 다양한 신들을 수용한다. 예를 들면, 예수라는 인물에 대해서 얘기를 듣고서 신전에 예수를 포함하기도 했다.”
―작품을 쓰기 위한 취재나 연구는 어떻게 했는지.
“종교적인 사고와, 동물원에서 동물들을 어떻게 케어 하는지, 바다에서 살아남기 위해 어떤 생존 스킬이 필요한지, 이런 것들을 연구해야만 했다. 일 년 반 정도 초고를 썼고, 이후 여러 번 다시 고쳐서 완성할 수 있었다. 『파이 이야기』는 한 인도 소년이 태평양을 건넌다는 훌륭한 스토리 아이디어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소년이 태평양을 건넌다는 건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과 같다고 생각됐다. 사람들에게 사인을 해줄 때 멕시코만까지 가셨으면 좋겠다고 하면 휴가 잘 가라는 뜻으로 받아들이시는 분도 있는데 그런 게 아니다. 좀 더 멀리 가보셨으면 좋겠다는 의미로 얘기를 한 것이다(웃음).”
―독자와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던 것인가.
“『파이 이야기』는 신적인 존재나 신앙, 종교에 대한 고민을 세속적인 방식으로 이해해 보려고 했던 작품이다. 컴퓨터 같은 경우는 고도로 발달된 것이지만, 도구에 불과하다. 컴퓨터는 아무리 발전을 하고 발달을 해도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누구인지를 정의하지 않고, 어떤 사람이 될 수 있는지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그것에 영향을 끼치는 것은 예술이나 종교다. 종교나 예술만이 스토리텔링을 통해서 이 세상과 다른 것들을 전한다. 『파이 이야기』는 바로 신이라는 존재가 있다고 생각해본 것이다.”
글이 되는 텍스트성(textuality, of being in written words). 그가 글쓰기에 매료돼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순전히 텍스트성 때문이었다. 마치 어린이들이 레고 블록을 좋아하듯, 단어 자체를 사랑했다. 캐나다 트렌트대에서 철학을 공부한 뒤 주차장 관리원과 식기세척 아르바이트, 경비원 등의 잡다한 일을 한 뒤 여행 끝에 27세부터 글을 쓰기 시작한 그였다.
처음에는 희곡을 썼다. 희곡을 처음 썼을 땐, 마치 신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작은 세계를 자신이 모두 창조하는 듯한 상상에 빠지기도 했다. 하지만 희곡을 두 번 쓴 뒤, 드라마를 포기하고 단편소설로 돌아섰다. 왜냐하면 대화를 통해 이야기를 전개하는 것보다 산문을 통해 이야기를 진행하는 게 더 쉽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후 단편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텍스트성과 스토리가 재미있어서 쓰고 또 썼다. 여기에 운도 따랐다. 자신이 쓴 단편소설을 친구가 문학잡지에 보냈는데, 채택이 돼 발표가 됐다. 좀더 긴 서사를 좋아했던 그는 작품을 신중하게 계획해 작은 조각으로 쪼개 완성하는 방식으로 소설 실험을 이어갔다. 그리하여 첫 소설집이 나왔다. 소설 창작수업을 한 번도 들어본 적도 없고, 작법서 역시 한 권도 읽지 않았던 얀 마텔이 소설가가 된 데에는 텍스트성과 스토리에 대한 기쁨이 출발이었다.
1963년 스페인에서 캐나다 외교관의 아들로 태어난 얀 마텔은 1993년 첫 소설집 『헬싱키 로카마티오 일가 이면의 사실들(The Facts Behind the Helsinki Roccamatios)』를 펴내면서 작품 활동을 본격화했다. 이후 장편소설 『셀프』, 『파이 이야기』, 『20세기의 셔츠』, 『포르투갈의 높은 산』 등을 펴냈다. 부커상을 비롯해 많은 상을 수상했다.
―『파이 이야기』를 쓴 후 20년이 넘게 흘렀다. 작가로서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나이가 들면서 사람으로서, 작가로서 발전했다는 생각이 든다. 보는 눈이 더 명확해지기도 했고, 더 효율적인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파이 이야기』를 통해서 충분히 성공을 거뒀기 때문에, 성공해야 된다는 생각은 전혀 없고, 뭔가 도움이 되는 스토리가 있다면 관심을 갖게 된다. 글이 갈수록 더 실험적이 돼 가는 것 같다. 젊었을 때는 컴퓨터 앞에 끈기 있게 앉아서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붙어 있었는데, 지금은 나이가 들면서 문제가 생기면 자리를 떠나 잠깐 시간을 보내고 돌아오곤 한다. 그 사이에 문제가 해결되는 경우를 많이 봤다. 글을 쓴다는 것 자체가 인생철학이라고 생각한다. 인생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소설 쓰는 방식이 궁금하다. 취재 내용을 봉투에 분류해 활용한다고 했는데.
“(취재 조사 내용을 봉투에 분류하는 것은) 책을 쓸 때 하나의 방법일 뿐이다. 책을 쓰려면, 조사라든가 연구를 굉장히 많이 한다. 그런 식으로 학교 교육을 계속 이어나가는 것 같다. 최근 작품의 경우 호모에 대해서 많이 연구를 했어야 됐고, 여러 자료를 찾아보며 적어놓은 노트들이 있는데, 다 모으면 300~400페이지가 된다. 내용별로 종류별로 봉투에 나눠서 분류를 해 넣어놓고 책을 쓸 준비가 되면, 봉투를 열게 된다. 『파이 이야기』의 경우 첫 번째 봉투가 「작가 노트」였다. 마치 하나의 산을 깎아내리다 보면 작은 돌로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차기작 계획은.
“편집자가 책을 만드는 동안 새 책을 썼다. 내용은 알츠하이머병에 관한 것인데, 어떻게 보면 내러티브 순서를 가지고 실험하는 책이 될 것 같다. 곧 출판될 예정이다.(차기 장편 『선 오브 노바디』를 조금 알려 달라) 호머의 『일리아드』를 읽고 영감을 얻게 됐다. 당초 영감을 얻기 위해서, 또는 책을 쓰기 위해서 읽은 게 아니었다. 『일리아드』는 서구 문명에서 처음 쓰여진 책으로 알려져 있어서 한번 읽어야지 라는 생각을 가지고 읽었다. 처음엔 지루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읽었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모던하고 시의성 있는 작품으로 느껴졌다. 큰 그림을 그려주기도 했고, 세세한 디테일도 잘 표현이 돼 있어서 뜻밖이었다. 『일리아드』에서 발언하는 사람들은 전부 다 왕이거나 왕자, 귀족이다. 유일하게 평민으로서 한 명만이 발언하는데, 그 평민을 오디세우스가 팬다. 제 책에선 유일하게 발언한 평민의 친구가 이야기를 전개하는 형태를 띠고 있고, 실험적인 포맷을 채택하게 됐다.”
인도 소년 파이와 반대로, 멀리 캐나다에서 태평양을 날아서 아시아로 건너온 이야기꾼 얀 마텔은 이날 한국 기자들의 질문에 대해서 성실하게 답했다. 오히려 너무 성실하고 친절하게 대답하는 바람에 매번 통역자가 버거워할 정도였다. 스스로 천천히 오래 생각하는 작가라고 밝힌 그는, 과연 먼 훗날 한국이나 한국인을 배경으로 멋진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그의 심장을 뛰게 할, 스릴 있고 신나는 이야기를 이번 방한에서 건져낼 수 있을까.
“스릴 있고 신나는 이야기들을 발견했을 때 글을 쓰고 싶고 또 계속해서 쓰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일화 같은 것은 한 번 듣고 끝나는 것이어서 깊이도 없고 부풀릴 수 없지만, 좋은 스토리 아이디어는 계속해서 풀어나갈 수 있어요. 스토리로 풀어갈 수 있는 아이디어를 발견했을 때 굉장히 들뜬 마음을 갖게 되죠. 마치 높은 사양의 컴퓨터를 구매했을 때 느끼는 감정과 비슷하다고 할까요. 신나게 읽을 수 있는 스토리를 좋아하기 때문에 책도 그렇게 쓰려고 노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