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수의료 붕괴 사태가 현실로 다가왔는데 정부와 의사단체 간 의대 정원 확대 관련 이견이 좁혀지지 않자 보건복지부가 논의 주체에 환자와 전문가 등을 포함하기로 했다. 의사단체가 강력히 반발하고 있어 의대 정원 확대 논의가 원점으로 되돌아갈 수도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전문가들은 의사 수를 늘리지 않으면 진료과목·지역 간 의료인력 배분의 불균형이 더 커질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인구 구조에 따라 의대 정원을 정기적으로 조정하는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27일 복지부는 다음 달 보건의료정책심의위원회(보정심) 산하에 분과위원회나 전문위원회를 만들어 의대 정원 확대 관련 논의를 진행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의사 정원 확대 여부 및 규모와 관련해 그간 의료 공급자 격인 대한의사협회와만 논의해온 복지부가 보정심 산하 시민·환자단체 등 수요자 측과도 협의하겠다고 나선 것은 이해당사자인 의협과만 인력 문제를 논의하는 게 부적절하다는 비판을 의식한 것으로 풀이된다.
애초에 정부가 의대 정원 증원을 의협과 논의해야 한다는 법적 근거는 없다. 고등교육법 시행령은 대학 정원을 복지부와 교육부가 협의하도록 규정한다. 보정심은 보건의료인력지원법에 따라 의사 등 보건의료 인력수급 계획을 다루는 공식 기구이지만 사실상 ‘개점휴업’ 상태였다. 보정심은 복지부 장관을 위원장으로, 노동자·소비자·환자단체 등이 추천하는 수요자 대표, 의료단체가 추천하는 공급자대표, 보건의료 전문가, 정부 위원으로 구성된다. 다만 의협이 정부가 2020년 9월4일의 의정합의를 폐기했다며 강하게 반발하고 있어 앞으로의 논의에 난항이 예상된다.
국책연구기관인 한국개발연구원(KDI)과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은 의료서비스 수요와 의사 업무량 등을 고려하면 미래에 의사 인력이 부족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권정현 KDI 연구위원은 이날 복지부 주최로 열린 ‘의사 인력 수급 추계를 위한 전문가 포럼’에서 “현재의 의료 이용 수준으로 평가한 의사 인력의 업무량 수준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우리나라 인구 최대치가 전망되는 2050년 기준 약 2만2000명 이상의 의사가 추가로 필요하다”고 말했다. 진료과목별로는 2048년 기준으로 신경과는 1269명, 신경외과 1725명, 흉부외과 1077명, 외과 6962명의 의사가 더 필요할 것이라는 게 권 연구위원 추산이다.
권 연구위원은 “필요한 의사 인력 확충을 위해 일정 기간 의대 정원 확대가 불가피하며 추계 결과에서는 2030년까지 의대 정원의 5% 증원 시나리오가 2050년까지 필요 의사 인력 충족에 가장 가까운 수치를 나타낸다”고 설명했다. 현재 3058명으로 18년째 동결 중인 의대 정원을 2024학년도부터 매년 5%씩 확대하면 2030년엔 4303명이 된다. 시민단체도 공공의대를 설립해 의대 정원을 지금보다 1000명 이상 늘려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다만 2050년 이후엔 인구가 줄어들면서 의료서비스 수요도 줄어들 것으로 전망돼 의사 인력이 과잉 공급될 가능성이 있다. 권 연구위원은 “의대 정원의 추가 조정이 필요하다”며 “보건의료인력종합계획(5개년) 내에 의대 정원 조정 규정을 명시하고 정기적인 수요 전망에 바탕을 둔 정원 조정 방안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제언했다.
의협은 한국의 의사 수 증가율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보다 높고 의료 접근성도 높다는 점을 이유로 의사 수가 부족하지 않다는 입장이다. 2020년 기준 우리나라의 인구 1000명당 활동 의사의 연평균 증가율은 2.4%로 OECD 평균(1.7%)의 1.4배에 달한다.
장성인 연세대 의대 교수는 “필수의료 공백은 배분 문제로 해결할 수 있어서 우선순위 기반으로 전략을 내야 한다”며 “의료인력관리지원을 설립해 인력이 적소에 근무할 수 있게 지원하고 인력자원을 관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장 교수는 “2024년쯤 배출되는 의사를 현재보다 30% 늘렸다가 약 20년 후에 다시 현재 수준으로 낮추면 초과하는 부분이 상쇄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