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전주세계소리축제’가 오는 9월 열린다. 전주세계소리축제는 판소리를 중심으로 우리 전통음악(국악)을 계승·발전시키고 세계적으로 확장하려는 취지로 2001년 시작됐다. 전북도의 역점사업이라 매년 25억원 가까이 투입되는 등 예산 규모로만 보면 지방자치단체 최대 축제로 꼽힌다.
하지만 지금까지 이름값을 못했다는 평가가 적지 않다. 국악 중흥과 세계화는커녕 국내에서조차 잘 알려지지 않은 전북지역의 축제로만 머물고 있다는 것이다. 급기야 우리 소리보다 세계 각 나라의 소리(민속음악)를 소개하는 축제처럼 정체성마저 모호해졌다는 지적까지 나왔다. 이처럼 위기의 전통음악 축제를 구할 ‘특급 소방수’로 외과의사 출신의 이왕준(59) 명지의료재단 이사장이 전격 투입됐다.
전북도와 전주세계소리축제조직위원회는 지난 2월 이 이사장을 임기 3년의 새 조직위원장에 선임했다. 지난 5일 서울 성북구 삼청각에서 만난 이 위원장은 “올초 전북도에서 조직위를 맡아 달라는 연락을 받고 며칠 고민한 뒤 ‘국악 르네상스(부흥)를 해볼 수 있는 적기’라고 판단해 수락했다”며 “대신 ‘어떤 간섭도 하면 안 된다’는 조건을 달았다”고 말했다.
앞서 전북도 측은 전주세계소리축제 위상 제고와 혁신을 위해 전북과 연고가 있으면서 지명도와 추진력, 문화예술에 대한 조예를 갖춘 인사를 물색한 끝에 이 위원장을 낙점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주 출신인 이 위원장은 서울대 의대와 인턴·레지던트 과정을 마친 이듬해(1998년) 외환위기 사태가 터지면서 뜻하지 않게 병원 경영자가 됐다. 당시 부도 난 인천 세광병원(인천사랑병원으로 변경)을 인수해 ‘환자 제일주의’를 표방하며 3년 만에 빚을 다 갚고 정상화시켰다. 2009년에는 덩치가 몇 배 큰 경기 고양의 명지병원까지 인수한 뒤 6개월 만에 거액의 중도금을 모두 갚고 경기 북부지역 거점 병원으로 탈바꿈시켜 화제가 됐다. 특히 2009년 신종플루와 2015년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2020년 코로나19 사태 등 감염병 대응과 재난·응급의료 같은 병원의 공공적 역할에도 힘써 주목받았다. 한때 여야를 막론하고 정치권에서 러브콜을 보낼 때마다 완강히 거절한 그는 국악과 양악에 정통하고 국내외 음악계 등 각계 인맥이 넓은 것으로 알려진다.
이 위원장은 “국악과 클래식 음악을 접하고 좋아한 지가 각각 35년, 50년은 됐으니 국악과 양악 모두 섭렵한 마니아라고 할 수 있다”며 웃었다. “의대 1학년 때 오케스트라 바이올린 악장을 하다 2학년 때 운동권에 들어가면서 ‘내가 지금 부르주아처럼 클래식을 할 때가 아니다’ 하고 민중음악인 풍물패를 의예과에서 처음 만들었어요. 선뜻 하겠다는 친구들이 없어 겨우 설득해 다섯 명을 모은 뒤 꽹과리 잡고 ‘상쇠’(풍물패 지휘자)까지 했습니다.”
인턴·레지던트 시절 틈날 때마다 판소리 다섯바탕(흥보가·심청가·수궁가·적벽가·춘향가) 완창 공연은 물론 지역을 돌며 굿판까지 보러 다녔다. 그동안 본 판소리 완창 무대만 100회가량 된다고.
그는 ‘범 내려온다’로 유명한 ‘이날치’ 등 국악에 기반한 젊은 밴드와 송가인을 비롯한 국악인 출신이 돋보이는 트로트 열풍, 방탄소년단(BTS) 슈가의 국악을 접목한 노래 ‘대취타’를 거론하며 “오리지널(진짜) 국악에 대한 국내외적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고 진단했다.
이 위원장은 “전주세계소리축제를 국악 르네상스에 가장 중요하고 유용한 플랫폼으로 만들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한다”며 “(세계적 음악축제인) 잘츠부르크 축제처럼 전주에 가야만 경험할 수 있는 독보적인 국악축제가 되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를 위해 그는 조직부터 정비했다. 20여명의 조직위원을 대부분 교체하고 외풍에 흔들리지 않도록 하면서, 축제 프로그램의 질과 수준을 높이도록 집행위원회를 △판소리 △정가·민요 △소리극 △산조·시나위 △굿·연희 △월드·퓨전뮤직 등 분야별 전문가가 협업하는 9개 예술분과위원회 시스템으로 구축했다. 5억원을 목표로 잡은 후원금도 벌써 3억원 넘게 모았다.
이 위원장은 “일각에서 ‘국악인도 아닌 사람이 조직위원장을 맡았다’고 우려하는데, 난 국악 애호가일 뿐 국악계에 아무런 이해관계도, 출세하고 싶은 마음도 없다”며 “그래서 (누구보다) 더 공정하고 포용력 있게 전주세계소리축제의 변화를 주도할 수 있다. (국내외에서 관심 갖는) 최고의 국악축제가 될 수 있도록 국악계도 적극 협력해 줬으면 한다”고 당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