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임군홍을 아시나요?”
예화랑 김방은 대표가 이어서 묻는다.
39살이던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한 직후 그는 서울 명륜동 자택에서 납치된 뒤 행방불명됐다. 이 무렵 그는 자택에서 ‘가족’을 그리고 있었다. ‘가족’ 속에는 아내와 태중의 셋째 딸, 큰딸, 그리고 둘째 아들 덕진이 있다. 조선 청화백자, 손잡이가 달린 컵, 맥주잔, 항아리, 꽃신, 그리고 주칠을 한 탁자까지 그가 평소 좋아하던 것들도 함께 보인다. 그는 애정이 가득 담긴 ‘가족’을 미완성으로 남긴 채 생각지 못한 생이별을 당했다. 그리고 임군홍은 1979년(68세)에 북에서 타계한다.
개인이 감당하기엔 너무나 무거운 시대의 아픔이었다. 유족에 의해 70년 넘게 보관된 작품들이 보물처럼 남았다. 인상주의 양식, 야수파의 실험정신을 보여준다.
예화랑은 정전 70주년을 기념해 임군홍의 아들 임덕진씨와 함께 ‘화가 임군홍_Lim Gunhong, The Painter: 근대를 비추다’전을 열고 있다.
임군홍은 1930, 40년대 전쟁과 첨예한 이념의 대립 속에서도 중국, 일본 등을 오가며 활발하게 본인의 작품세계를 펼친 작가다. 납북 탓에 우리의 역사 속에선 묻힌 작가지만 그의 예술은 알아야 할 만한 가치를 지닌다.
전시는 일제강점기 억압된 시공간 속에서도 한국과 중국에서 활동하며 독학으로 일군 자신만의 화풍을 과감하게 실현한 ‘화가 임군홍’의 예술세계에 초점을 맞춘다. 시대를 뛰어넘은 담대함과 자유분방함, 장르를 넘나들며 캔버스에 펼쳐내는 ‘뚝심’이 압권이다.
내걸린 작품이 120점이나 되는 대규모 전시다. 한 작가의, 그것도 근대작가의 작품이 많이 남아있기는 드문 일이다. 당시 전쟁과 피란으로 작품을 보존하기란 어려운 일이었기에 작품을 지켜온 유족들의 눈물 어린 노력도 함께 보인다. 미공개 작품들과 더불어 국립현대미술관 기증 작품 등을 한눈에 볼 수 있다. 빛의 섬세한 변화와 공기, 그리고 바람까지 느끼게 하는 세밀한 분위기를 화폭에 구현하는 임군홍의 초감각적인 예술혼을 만나는 자리다.
1912년 서울 종로에서 출생한 임군홍(본명 수룡)은 1931년(19세)부터 녹향회, 조선미술전람회, 서화협회전람회 등 다수의 대회에서 입선하며 미술가로서 두각을 드러냈다. 그러다 1939년(27세) 엄도만과 함께 예림 스튜디오를 운영하며 디자이너로도 활동했다.
그는 이 시기에 중국 한커우로 이주해 미술 광고사를 운영하는 등 산업미술가로 일했다. 한커우와 베이징을 오가며 중국에서 다수의 작품을 그렸고 베이징에서 개인전도 가졌다. 광복 이듬해 서울로 돌아와 인쇄소와 광고회사를 열고, 화가를 겸업하며 예술가로서 활동을 지속했다. 그러던 1948년(36세) 운수부 홍보 달력에 탈북 무용가 최승희의 그림을 실었다는 죄로 투옥됐다. 당시 미군정청 군정장관이던 윌리엄 프리시 딘이 발행한 특별 사면서로 6개월 옥고 후 사면 복권됐다.
출감 후 그린 작품 ‘자화상’에서는 자신의 존재에 대한 고뇌와 허무, 쓸쓸함이 느껴진다. ‘새장 속의 새’는 자신의 처지를 새장에 갇힌 새로 비유해 자유를 갈망하는 마음을 표현했다.
9월26일까지 서울 강남구 가로수길 예화랑에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