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책가방을 싸다가 문득 숙제 공책을 펼쳐 보았다. 펼친 장에 삐뚤빼뚤한 아이 글씨로 질문과 대답이 적혀 있었다. 질문은 한 줄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대답은 1번부터 3번까지 있었다. 1번, 잴리 먹기. 2번, 카패 가기. 한숨이 나왔다. 잴리라니. 카패라니. 어려운 낱말도 아니거니와 좋아한다면서, 좋아하면 더 잘 알고 더 잘 기억하기 마련이건만 맞춤법을 이 지경으로 써 놓다니. 그러나 더 어처구니없는 대답은 3번이었다. 동굴 가기. 아니나 다를까. 그 바로 아래에 선생님의 피드백인 듯 반듯한 어른 글씨로 한 문장이 덧붙어 있었다. 무슨 동굴? 그러게. 나야말로 묻고 싶었다. 대체 무슨 동굴?
사나흘 전이었을 것이다. 아이가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대해 써 가는 숙제가 있다고 했을 때 나는 평소와 달리 이번에는 엄마와 상의 없이 혼자 힘으로 한번 해보라고 했다. 아이는 하기 싫다, 생각이 안 난다, 못 하겠다 하며 떼를 쓰더니 내가 계속 외면하자 결국 혼자 한 모양이었다. 어쨌든 했으니 다행이지만 그래도 이렇게 엉망으로 했을 줄은 몰랐다. 잴리에다 카패에다 뜬금없이 동굴이라니. 동굴 근처에도 못 가 봤으면서.
나는 아이에게 공책을 보여 주며 물었다. 이것 좀 봐봐. 네가 좋아하는 게 젤리 먹는 거랑 카페 가는 거랑 동굴 가는 거야?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젤리 좋아하는 건 엄마도 알아. 시원한 카페에서 아이스크림 먹는 것도 좋아하고. 그런데 동굴 가는 건 뭐야? 너 동굴 가본 적 없잖아.
어휴 참, 엄마, 그건 진짜 동굴이 아니고 이야기의 동굴이야. 나는 더욱 어안이 벙벙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엄마가 밤에 잘 때 나한테 재미있는 이야기 들려주잖아. 그게 꼭 이야기의 동굴 같거든. 아이는 진지했다. 나도 진지한 어조로 되물었다. 좋아, 그러면 이야기의 바다라고 해도 되고 이야기의 들판이라고 해도 될 텐데 왜 동굴이라고 했어? 응. 이야기를 듣다 보면 내가 점점 더 깊고 컴컴한 곳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거든. 그러니까 동굴이지. 나는 잴리와 카패 때문에 상심하여 깊고 컴컴한 구렁텅이로 떨어지는 것 같던 기분도 잊고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네. 동굴 맞네. 잘했어. 아주 좋은 표현이야. 그나저나 너 동굴이 여름엔 시원하고 겨울엔 따뜻한 거 알아? 우리 날씨도 더운데 진짜 동굴에 한번 다녀올까? 정말? 우와, 신난다! 아이가 제자리에서 폴짝폴짝 뛰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