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지대 돌풍의 신호탄인가, 투표율 급락의 전조인가.’
내년 총선을 8개월 앞두고 국민의힘과 더불어민주당의 지지층이 빠른 속도로 이탈하고 있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무당층 비율은 30% 이상을 기록 중이다. 무당층이 두 당의 지지율을 앞지른 여론조사 결과도 나왔다. 양당이 내년 선거를 대비해 밑바닥 표심을 다져야 할 시기에 되레 무당층이 증가하고 있는 것이다.
정치권은 선거에 가까워질수록 증가하고 있는 무당층이 내년 총선에 어떤 파장을 미칠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전문가들은 내년 총선에 양당에 싫증이 난 민심을 담아낼 새 정치세력이 등장한다면, 무당층은 정치 변화의 기폭제가 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진보와 보수 진영 모두에서 중도정치, 실용정치를 표방한 신당 창당 움직임은 가속화하는 상황이다.
그러나 선거제와 같은 현실적인 문제로 양당 중심의 구도가 또다시 고착화한다면 투표율이 하락하며 정치 혐오와 무관심만 더욱 커지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는 반론도 만만찮다.
최근 발표된 여론조사 결과를 종합하면, 현시점에서 무당층은 전체 유권자의 3분의 1가량을 차지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지난 4일 발표된 한국갤럽의 8월 첫째 주 여론조사에서 무당층 비율은 32%로 집계됐다. 같은 조사의 국민의힘(32%), 민주당(31%) 지지율과 비슷한 수치다. 케이스탯·엠브레인·코리아리서치·한국리서치가 지난 3일 발표한 전국지표조사(NBS)에선 무당층이 ‘제1당’을 차지했다. 무당층 비율은 37%였고, 국민의힘과 민주당 지지율은 각각 32%, 23%로 조사됐다.
무당층은 대통령 선거가 치러진 지난해 3월(한국갤럽, 17%) 이후 꾸준히 증가해 최고치를 기록했다. 현 정부 출범 후 여야가 ‘강 대 강’ 대치를 반복하며 정치 불신과 혐오를 키운 게 원인이라는 분석이다. 일본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문제, 새만금 세계스카우트 잼버리 문제 등 국민의 생명과 국익이 걸린 사안에도 양당이 콘크리트 지지층만 겨냥한 정치 공세를 일삼은 결과라는 것이다.
이종훈 정치평론가는 8일 “양당이 극한 대립 상태이다 보니 실망감이 큰 중도층을 중심으로 무당층이 증가하는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한국갤럽의 8월 첫째 주 조사를 보면, 국민의힘과 더불어민주당의 비호감도는 모두 61%로 호감도(두 당 모두 30%)의 두 배에 달한다.
◆무당층 겨냥한 신당 창당 활발
정치권은 30%를 상회하는 무당층이 내년 총선에 끼칠 영향을 예의주시하는 분위기다. 양당에 염증을 느끼는 무당층이 선거기간까지 견고히 유지된다면, 제3당이 출현하는 기반이 될 수 있어서다. 계명대 김관옥 교수(정치외교학)는 “변화에 대한 욕구가 국민들 사이에 충분히 있다”며 “선거제와 인물, 정책이 결합한다면 신당이 성공할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진보와 보수 진영 모두에서 양당의 이탈표에 기댄 신당 창당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민주당 출신 무소속 양향자 의원이 주도하는 ‘한국의 희망’은 오는 28일 창당대회를 열고 활동을 본격화한다. 광주 서구을이 지역구인 양 의원은 통화에서 “민주당 김은경 혁신위원장의 노인 폄하 발언이 나온 후 광주에서 민주당에 더 이상 기댈 수 없다는 분위기가 확산하고 있다”며 “내년 총선에서 전체 지역구에 공천할 것”이라고 말했다.
민주당을 탈당하고 윤석열 대통령의 대선 캠프에 몸담았던 금태섭 전 의원은 9월 말 ‘새로운당’(가칭) 창당대회 개최를 목표로 하고 있다. 금 전 의원은 진영 정치를 탈피한 실용정치를 지향하는 신당을 염두에 두는 것으로 전해졌다.
여권에선 유승민 전 의원과 이준석 전 대표 등이 중심이 된 비윤(비윤석열)계가 무소속 출마와 신당 창당 가능성을 열어놓은 상태다. 이들은 SNS와 방송 등을 통해 윤 정부의 실정을 꼬집으며 비윤 표심을 결집하고 있다. 4%대 지지율인 정의당에서도 진보정당의 진로를 두고 네 그룹으로 나뉘어 창당 시도가 일고 있다.
◆무당층 다수는 신당에 회의적
그러나 무당층이 곧바로 신당의 지지층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최근 양당에서 이탈하는 표심에는 새로운 정치세력에 대한 희망보다는 정치권에 대한 혐오가 깔렸다는 분석도 나오기 때문이다.
한국갤럽 8월 첫째 주 조사에서 이 같은 흐름을 엿볼 수 있다. 한국갤럽은 총선 전 신당 창당에 대한 인식을 조사했는데, 무당층의 45%가 “좋지 않게 본다”고 답했다. “좋게 본다”(32%)는 답보다 많은 수치다. 무당층은 신당의 성장 가능성에 대해서도 60%가 “없다”고 답했다. “성장 가능성이 있다”는 응답은 18%에 그쳐 전체 응답자의 생각(15%)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명지대 신율 교수(정치외교학)는 “과거의 무당층은 선거 당일에 투표를 하러 가는 참여형 무당층이었는데, 지금은 정치적 무관심층이 무당층”이라며 “무당층이 정치에 염증을 느끼긴 하지만 그렇다고 신당을 찾지는 않는다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신 교수는 “그렇기 때문에 무당층을 보며 신당을 만들면 안 되고, (신당이) 국민의힘과 민주당에 실망한 소극적인 지지층을 빼내 올 수 있을 때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신당 한계 속 투표율 하락 우려
과거 제3당이 성공한 사례를 살펴봤을 때 현재의 신당 창당 시도의 한계점이 크다는 지적도 나온다. 민주화 이후 제3당이 총선에서 20석 이상을 확보해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하는 데 성공한 대표적인 사례는 김종필(JP) 총재가 이끈 1996년 자유민주연합(자민련)과 안철수 당시 대표가 이끈 2016년 국민의당이다. 둘 모두 대선주자급의 인물이 중심이 됐고 충청과 호남 등의 지역 기반을 가졌다는 게 공통점이다.
신 교수는 “대통령제에서 유력 대선 후보가 없는 정당은 사라지게 돼 있다”고 설명했다. 김관옥 교수는 “(유권자가) 차기 대권 후보와 같은 미래 권력을 상상하면서 투표하는 경향이 있어 그런 인물을 중심으로 당이 만들어지는 것”이라면서도 “인물 중심 정당은 자민련과 국민의당처럼 한 사람의 결정으로 당이 사라지기도 해 지속가능성이 없다”고 지적했다. 김 교수는 “이번에는 인물에 의존하기보다는 정책적인 지향점을 갖는 신당이 들어섰을 때 지속가능성이 있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양당제를 촉진하는 현행 선거제도 신당의 걸림돌로 꼽힌다. 비례의석이 전체의 15.7%(300석 중 47석)에 그치는 가운데, 지역구 의원을 소선거구제(한 선거구당 한 명 선출)와 단순다수대표제(한 표라도 많은 후보자가 당선)를 결합한 방식으로 선출하는 현행 선거제하에선 제3당이 등장하기 어렵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평가다. 박상병 정치평론가는 “선거제가 바뀌지 않는 한 내년 총선에서 신당이 성공하기는 어렵다”며 “지역구 의석을 줄이고 중대선거구제를 만들고 비례대표를 늘려야 한다”고 말했다.
결국 무당층이 내년 총선에서 투표를 포기하며 정치적 무관심이 확산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온다. 이종훈 정치평론가는 “무당층의 이해관계와 선호를 반영한 신당이 출현하지 않는다면 이들은 아예 투표장에 안 나올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했다.
◆“민주화 이후 줄곧 ‘승자독식’ 선거제 민심 반영 못 하는 정치구도 굳어져”
“무당층 32%를 결코 이례적인 현상으로 볼 수 없다.”
8일 한 정치 전문가는 총선이 다가올수록 무당층이 늘어나는 현 상황을 이같이 평했다. 과거를 돌이켜보면 무당층 비율은 20%대와 30%대를 오가며 일정 수준 유지돼 왔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무당층 비율이 현 정부 집권 이후 최고치를 기록한 데 대해 민주화 이후 줄곧 ‘승자독식’ 선거제를 채택하면서 민심을 반영하지 못하는 정치구도가 굳어진 점을 원인으로 짚었다. 유권자들이 기성 정당에 싫증을 느끼더라도 현 선거제하에선 사표 심리 탓에 대안 정당을 선택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박상병 정치평론가는 “국민의힘과 더불어민주당은 아무리 망해도 제2당은 보장받는 구조”라며 “덜 망하기 위해 상대 당을 계속해서 때리는 것”이라고 말했다. 박 평론가는 “결국 대화를 실종케 하고 무한 정쟁을 반복하는 구조가 한국 정치에 자리매김했다”며 “무당층은 여야의 무한 정쟁에 지쳐버린 사람들”이라고 덧붙였다.
실제로 한국갤럽의 과거 여론조사 결과를 분석하면 올해 8월 첫째 주 무당층 비율로 집계된 32%가 크다고는 할 수 없다. 2013년부터 2021년까지 한국갤럽의 8월 첫째 주 조사를 2년 단위로 보면, 무당층 비율은 40%(2013년)→34%(2015년)→22%(2017년)→24%(2019년)→23%(2021년)를 기록했다. 자세한 내용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를 참조하면 된다.
최근 양당이 민생을 위한 협치보다는 강대강으로 대치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무당층 증가 흐름은 더욱 가속화하고 있다. 여야는 평상시에는 정치 현안에 대해 날 선 공방만 주고받다가 수해와 같은 사고가 발생한 후에야 부랴부랴 입법에 나서는 상황을 반복하고 있다.
계명대 김관옥 교수(정치외교학)는 “여당은 물가와 일자리 같은 경제 문제뿐 아니라 외교와 대통령의 가족 문제 등에서도 유능함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며 “야당은 국정이 잘 운영되지 않고 있는데도 ‘전당대회 돈봉투’ 의혹 등이 불거지며 국민에게 득이 되는 견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다”고 평했다. 김 교수는 “두 정당 모두 국민의 만족도를 높이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무당층 현상을 부정적으로 볼 수만은 없다는 지적도 있다. 신율 명지대 교수(정치학과)는 “무당층이 적다는 것은 정치적 양극화가 심하다는 것”이라며 “진영 논리와 정치적 양극화를 비판하면서 무당층의 증가를 걱정하는 것은 논리적 모순”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