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여섯 걸음 거리를 두고 관람하면 볼록 튀어나온 양각처럼 보인다. 그러나 벽에 걸린 작품을 향해 성큼 다가가면 안쪽으로 오목하게 파인 음각으로 조각되어 있다. 마냥 신기하다. 분명 움푹 파냈는데도 바깥으로 도드라져 보이는 것이다. 게다가 형태만이 아니라 질감까지 오롯이 담아내고 있다. 조각 속 인물이 입고 있는 옷감의 엷고 두터움까지 구현해내는 것이다.
조각가 이용덕(서울대 교수)이 창안한 ‘역상조각’이다.
작품 가까이 접근한 관람객들은 조각이 지닌 부피감이나 존재감, 손으로 만져볼 수도 있다는 기대감 대신, 방금까지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대상이 어느새 쏙 빠져나가 버린 듯한 빈자리를 감지하게 된다. “헐!” 음과 양이 뒤바뀌어 제작된 조각의 파인 공간이 주는 공허함이 엄습한다. 순식간에 벌어진 정반대의 현상에 관람객들은 그저 자신의 눈을 의심하며 배시시 웃을 뿐이다.
그는 일상 속에서 아름다움울 찾았다.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의 동작은 물론 그들의 움직임에 따라 구겨지는 옷주름까지도 아름다워 보였단다. 그는 “그것들을 저장(save)해 놓거나 전이(transfer)해 보고 싶었다”고 털어놓는다.
이러한 역상조각은 이용덕을 세계 현대조각의 주요작가로 손꼽게 만들었다. 독일 베를린 슐뮤지엄, 중국 국립미술관, 마카오 미술관, 상하이 다륜미술관 등 국내외에서 19차례 개인전을 가졌고, 여러 나라에서 100여회 단체전에 참가했다. ‘조각계의 한류스타’란 별칭이 붙은 이유다.
그의 천재성은 일찌감치 독일 유학시절부터 모습을 드러냈다.
서울대 미대 조소과와 대학원을 졸업한 이용덕은 대한민국미술대전 대상을 수상하고, 스승인 한국 추상조각의 개척가 최만린 선생의 무한 사랑을 받는 등 탄탄대로에 서 있었지만 망설이지 않고 독일 유학을 택했다.
1994년 가을, 그는 베를린의 한 벼룩시장에서 한 장의 사진 속으로 빨려들어간다. 1920년 10월 24일 한 초등학교의 1학년 학급을 찍은 사진이다. 아이들의 표정이 왜 그토록 슬퍼 보였을까. 1차 세계대전 직후 기근과 질병, 억압의 시기였다. 이후 이들은 어떤 운명의 삶을 살았을까.
사진 속 아이들은 취학 전 제1차 세계대전을 경험했다. 20대에 또다시 제2차 세계대전을 겪는다. 유태인이나 폴란드 이름을 가진 아이들은 살아남았을까. 독일군으로 참전한 아이들은 스탈린그라드에서 무사했을까. 이후 동독 또는 서독 어디에서 삶을 꾸렸을까. 통일독일을 맞이했을까.
이용덕은 33명 아이들 표정을 하나하나 조각상에 담았다. 작품 ‘kl. k. 7d. 24. 10. 1920. BERLIN’이다. 우울한 아이, 불안한 아이, 눈병 걸린 아이… 고유한 개별 정체성을 부여했다. 이들의 일생 중 가장 순수했던 시절의 표정인 것이다. 과거로 사라진 것만 같았던 아이들이 조각상을 통해 현세에 부활했다. 얼굴은 제각각 다르지만 몸통부분은 모두 똑같은 모습이다. 전체주의 피교육을 거쳐 독일군으로 성장하는 등 이데올로기화되어가는 과정을 돌이켜보자는 뜻이다.
그는 독일 현대사에서 우리의 현대사를 떠올리며 작업을 이어갔다. 일제강점기에 유년을 보낸 우리 아버지 세대도 6·25를 겪은 뒤 남북으로 분단된 채 살아오고 있다. 인류의 문제다. 예술가로서 할 바를 한 것이라 자부한다. 1997년 베를린 숄뮤지엄에서 첫선을 보인 이 작품은 이후로도 10년 동안 여러 곳에서 전시됐다.
그는 공공조형물도 다수 제작했다. 안중근 의사상(남산, 안중근기념관)과 유관순 열사상(삼일공원, 동작구)이 대표적이다. 김수환 추기경상, 프란치스코 교황상(명동성당), 정주영 정신영 형제상(서울 관훈클럽)도 그의 작품이다. 대치동 포스코 사옥의 박태준 회장 부조도 그가 만들었다. 중절모의 박 회장이 당당히 서 있는 이 역상조각은 관람자가 움직이면 같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품안에서 태극기를 빼내는 안중근 의사상은 투사 이미지보다 동양평화론을 제창한 지성인 이미지를 부각시켰어요. 흔히 보아온 의거 순간에 집중하기보다는 보다 우월한 삶의 정신을 기리는 것입니다.”
지난 봄에는 서울 용산역 광장 ‘ROKAUS’(로카우스, 용사의 집) 앞에 높이 8.2m의 작품 ‘위대한 결집’이 들어섰다. 4개의 기다란 금속막대를 성냥쌓기 하듯이 쌓아올리며 나라와 겨레에 충성하는 용사의 모습을 표현했다. 국군 장병의 거수경례, 차렷자세 등을 반은유적으로 드러내며 결집력을 시각화했다. 빛이나 시선의 방향에 따라 각기 다른 형상이 나타난다.
한눈 팔지 않고 한길만 걸으며 ‘범생’의 삶을 살아온 그는 요즘들어 살짝 들뜨거나 설레기까지 한다. 학교를 떠나는 내년 2월 이후 펼쳐질 인생 후반전에 대한 기대와 계획 때문이다.
“전업작가로서 새로운 것, 안 해본 일을 찾아나설 겁니다. 재직중이라 작업에 흠뻑 몰입하여 살지 못했는데, 마침내 전업작가만큼 그렇게 할 수 있는 시간이 다가오고 있어요. 미뤄둔 일이 꽤 있거든요. 후반전에 만들 작품들은 아무래도 뭔가 달라지겠죠. 시간도 늘고 충분히 여유있게 표현할 수 있을 테니. 더 좋은 작품들이 탄생할 수밖에 없을 테죠.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