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자산시장이 출렁이고 있다. ‘2차전지’, ‘초전도체’, ‘양자컴퓨터’ 등 테마주 열풍이 주식시장을 휩쓴다. 서울 부동산시장에선 수십대 1의 청약경쟁률이 일어나고 거래량이 살아나면서 가격이 조금씩 상승 추이를 보인다.
한국은행이 ‘당분간 금리를 올릴 가능성을 열어둬야 한다’며 현 기준금리 3.5%의 고금리 기조를 바꾸지 않고 미국연방준비제도이사회도 기준금리(5.25∼5.5%) 추가인상을 배제하지 않는 상황인데도 나타나는 현상이다.
◆다시 치솟는 ‘빚투·주담대’
주식시장 자금은 증가 추세다. 25일 금융투자협회 통계시스템에 따르면, 지난 22일 기준 투자자예탁금(장내파생상품 거래예수금 제외)은 51조7512억원으로 집계됐다. 두 달 전인 6월22일 50조5236억원에 비하면 1조2276억원 증가했다. 투자자예탁금은 주식투자를 위해 증권사에 맡겨두거나 주식 매매 후에 찾지 않은 자금으로 잠재적 주식투자 자금이다. ‘빚투’(빚내서 투자)도 마찬가지다. 22일 기준 신용거래융자 잔고는 20조1884억원을 기록해 두 달 전(6월22일·19조4290억원)보다 7594억원 늘어났다. 신용거래융자 잔고는 8월 들어 20조원대를 유지하고 있다.
주식시장으로의 자금 쏠림은 우선 ‘2차전지’, ‘초전도체’와 같은 테마주 급등과 연관이 있다. 대표적인 2차전지 관련주로 꼽히는 에코프로는 지난해 말 10만3000원이었던 주가가 23일 122만1000원까지 오르면서 지금까지의 수익률로만 1085%를 기록했다. ‘2차전지’ 관련주의 또 다른 특징은 개인 투자자의 순매수가 높다는 점이다. 에코프로 경우 올해 초부터 23일까지 개인 투자자는 5208억원의 순매수세를 기록했다. 같은 기간 기관은 6629억원을 순매도했다.
최근 주식시장는 테마주는 ‘초전도체’, ‘맥신’, ‘양자컴퓨터’ 등 신소재 및 과학 관련주로 이동하고 있다. 상온 초전도체 ‘LK-99’ 관련 논문 공개 이후 초전도체 관련주들이 상승하더니, 상온 초전도체 실제 논란 후에는 센서, 전극재료 등으로 쓸 수 있는 신소재인 ‘맥신’의 대량생산 연구 소식에 관련주들이 폭등했다. 이후엔 국내 연구진의 양자컴퓨터 관련 연구 소식에 양자컴퓨터 관련 주식들이 줄줄이 상한가까지 치솟았다.
자금이 몰리는 현상은 부동산에서도 엿보인다. 한국부동산 청약홈에 따르면 지난 16일 마감한 서울 동대문구 소재 래미안 라그란데 1순위 청약 결과 468가구에 3만7024명이 신청해 평균 경쟁률이 79.1대 1을 기록했다. 이 아파트의 3.3㎡당 분양가는 평균 3285만원으로 전용면적 59㎡의 경우 발코니 확장 등을 고려한다면 사실상 9억원이 넘는다. 한국부동산원이 발표한 8월 2주차 주간 아파트 가격 동향에 따르면 전국 아파트 매매 가격은 0.04% 상승했는데, 서울만 보면 0.09% 상승해 전주 대비 상승폭이 유지됐다.
아파트 매매 심리 증가로 대출도 빠르게 늘어나고 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7월 말 기준 은행권 가계대출 잔액은 1068조1000억원으로 한 달 전보다 6조원 늘며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다. 4개월 연속 증가세다. 8월에도 대출 증가세는 계속되고 있는데, 5대 은행(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의 1∼10일까지의 가계대출 잔액은 679조8893억원으로 열흘 만에 6685억원이 늘어났다. 특히 주택담보대출(주담대)은 이 기간 1조1174억원이나 급증했다.
◆“투자자 ‘눈높이’ 그대로”
자산시장에 몰리는 자금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한은은 지난달 ‘팬데믹 이후 가계 초과저축 분석 및 평가’ 보고서에서 팬데믹 이후 한국 가계에 축적된 초과저축 규모를 101조∼129조원으로 추산했다. 한은은 “금리 상승으로 부채 상환 유인이 증대되었음에도 우리 가계의 디레버리징(부채축소)이 주요국보다 상대적으로 더딘 모습을 보인다”며 “2020∼2022년 중 우리 가계의 금융자산과 부채가 동시에 많이 늘어났는데, 이는 우리 가계가 초과저축을 부채 상환에 적극적으로 활용하기보다는 금융자산으로 보유하고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고 지적했다.
전문가들은 최근 자산시장의 움직임을 이러한 유동성에서 찾는다. 2분기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이 0.6%에 그치는 등 한국 경제의 불확실성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유동성은 높고 ‘포모’심리가 지속되는 데 따른 결과라는 것이다. 정용택 IBK투자증권 수석연구위원은 세계일보와의 통화에서 “돈은 굉장히 많은데 경기 방향성은 불확실하고 투자자 ‘눈높이’도 조정되지 않았다”며 “많은 돈이 기대 수익이 높은 쪽을 쫓아다니고 있기 때문에 2차전지와 같은 (테마주에) 쏠림이 확 나오고 있다”고 지적했다.
부동산시장도 마찬가지다. 함영진 직방 빅데이터랩장은 “서울과 수도권, 세종시 정도만 부동산시장 회복을 주도하고 있고 지방은 낙폭 둔화 내지는 미분양에 따른 부담으로 고전하고 있다. 양극화 국면”이라며 “돈은 있는데 변동성은 있고 경기는 안 좋다 보니 사람들이 선호가 높은 곳에 투자하고 있다. 일종의 리스크 헤징(위험 회피)”이라고 말했다. 경기불안에 대한 공포에 투자에서 뒤처지면 안 된다는 불안심리가 겹쳐지고 있는 것이다.
한은이 경기침체 등의 우려로 금리 인상을 쉽게 하지 못하고 있고, 은행권 대출금리가 낮게 유지되고 있는 것도 현재 투자 증가세의 원인으로 꼽힌다. 성태윤 연세대학교 경제학부 교수는 “물가나 미국과의 금리 역전 문제, 가계대출 확대세 등을 고려해 봤을 때 생각하는 것보다 금리가 낮게 유지되고 있다”며 “유동성 회수가 충분히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글로벌 경제의 불확실성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기초체력(펀더멘털)이 아닌 수익률만 좇는 매매형태는 자칫 부메랑으로 돌아올 수 있어 신중한 투자가 요구된다고 전문가들은 조언한다. 정 수석연구위원은 “기대 수익은 낮고 변동성을 방어할 수 있도록 투자전략을 짜는 게 맞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