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봄, 제6회 ‘교향악축제’가 열린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음악당 콘서트홀 무대. 오케스트라 협연자로 나선 앳된 얼굴의 피아니스트가 리허설 도중 조금 긴장한 낯빛으로 피아노 앞에 앉아 있다. 미국 맨해튼 음대로 유학을 떠나 피아노과에서 학사·석사·박사를 마치고 돌아와 처음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무대에 섰으니 그럴 만했다. 그 젊은 피아니스트는 몰랐을 것이다. 훗날 피아노 없이도 예술의전당 무대에 오를 날이 올 수도 있다는 걸.
지난해 6월 취임한 장형준(61) 예술의전당 사장 얘기다. 장 사장은 취임 후 석 달가량 지나 음악당 IBK챔버홀에서 한 취임 기자간담회에서 29년 전 리허설 모습이 담긴 사진을 공개했다. 남아 있을 거라 상상도 못한 터라 사장이 되고 나서야 처음 본 사진은 감회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는 “29년 세월이 훌쩍 흘러서 이제는 연주자가 아니라 사장으로 (예술의전당) 무대에 서게 됐다”며 “피아노 없이 무대에 올라오면 마음이 편할 줄 알았는데 그렇지도 않다”고 했다. 오래전 첫 무대 때와는 다른 이유이지만 역시 그럴 만했다.
문화체육관광부 산하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공공 예술기관인 예술의전당은 주로 관료 출신이 사장을 맡았다. 역대 17명의 예술의전당 수장 중 예술인은 2004∼2007년 김용배 전 사장(추계예술대 명예교수) 이후 장 사장이 두 번째다. 클래식 음악과 오페라, 발레, 연극, 미술, 서예 등 순수 예술을 공연·전시하는 국내 최고, 최대의 예술기관이지만 사장 자리는 정작 예술인에게 인색했던 셈이다.
―순수예술 장르 중 특히 오페라 활성화를 강조한 이유가 뭔가.
“(개인적으로) 예술의전당에서 가장 아쉬웠던 부분이 오페라극장이었다. 오페라는 성악과 기악, 미술, 무용 등 다양한 장르가 결합된 종합예술인데 국내 오페라극장은 사실상 예술의전당이 유일하다. 그런데 음악당(콘서트홀)과 비교해보면 위상이 별로다. (공연 시설과 작품, 음악가 등이) 세계적 수준인 음악당은 명성이 높은 반면 오페라극장은 알아주지 않는다. 이래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주변에서 ‘장형준이 사장됐으니 예술의전당은 이제 피아노 쪽만 잘 되겠다’고 하는 소리도 들었는데, 난 이미 잘 되고 있는 그쪽엔 관심도 없었다. 기악뿐 아니라 성악에서도 백석종(테너) 등 세계 무대에서 스타로 활동하거나 재능이 뛰어난 젊은 성악가가 많은데 정작 국내에선 이들을 보기 힘들다. 무대에 설 기회 자체가 적어 뮤지컬 등 아예 다른 길로 가기도 한다. 오페라가 제작 비용이 많이 들고 종합예술이라 만만한 작업이 아니지만 국내 오페라 저변을 확대하고 젊은 성악가들이 큰 무대에 설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할 것이다.”
예술의전당은 지난해 10월 ‘오페라 갈라’부터 최근 CJ토월극장에서 막 내린 ‘투란도트’ 등 수준 높은 오페라 공연을 잇달아 선보이며 많은 관객의 갈채를 받았다. 10월에는 이탈리아 벨칸토 오페라를 대표하는 벨리니(1801∼1835)의 ‘노르마’를 영국 로열오페라하우스 작품으로 무대에 올린다. 내년 7, 8월에는 세계적 성악가 연광철(베이스)·사무엘 윤(바리톤)의 ‘보컬 리사이틀 시리즈’와 이용훈(테너)의 한국 오페라 데뷔 무대인 ‘오텔로’가 예정돼 있다. 2025년엔 한국적인 이야기로 해외 진출을 노린 창작 오페라도 선보일 예정이다. 오페라극장 공연에 적합한 발레 작품도 대폭 늘린다.
―미래 예술세대 성장 지원의 핵심으로 ‘음악영재 아카데미’ 기능 강화를 꼽았는데.
“음악영재를 조기 발굴하고 육성하기 위해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1999년 개원한 예술의전당 음악영재 아카데미는 임윤찬과 조성진(피아니스트), 양인모(바이올리니스트) 등 지금까지 7000여명의 졸업생을 배출하며 클래식 전문 연주자의 산실이 됐다. 그런데 금관부가 없었다. 우리나라 오케스트라에서 가장 취약한 부분이 금관인 만큼 금관 연주자 육성 차원에서 올해 금관부를 개설했다. 아울러 영재들이 너무 경쟁에 노출되지 않고 음악을 즐겁게 배울 수 있도록 운영할 방침이다. (아이마다 성장 속도와 기질 등이 다른데) 탁월함만 추구하다 보면 쉽게 지쳐버릴 수 있어서다. ‘보컬 리사이틀 시리즈’ 등 국내외 유명 연주자 및 단체의 기획공연과 연계한 마스터클래스(명인 강좌)도 영재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또 임윤찬, 조성진처럼 섭외 자체가 힘든 연주자도 있지만 아직 알려지지 않은 보석 같은 친구가 많은데 이들을 적극 발굴하고 소개할 것이다.”
―문화예술 향유 플랫폼은 어떻게 구축하나.
“우선 문화예술기관 최초로 공연을 영상화할 수 있는 스튜디오 ‘실감’이 지난해 가동되면서 고품질의 다양한 공연 영상을 제작할 기반이 마련됐다. 실감은 예술의전당에서 공연·전시되는 작품들을 실시간으로 촬영·중계·송출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췄다. 예컨대 올해 음악당에서 개최된 교향악축제 공연 영상이 부산 영화의전당 야외 스크린으로 실시간 전송돼 많은 부산 시민이 무료로 즐겼다. 최근 음악당 무대 바닥도 큰돈을 들여 교체한 것도 최고의 영상을 담기 위해서다. 예술의전당 자체 기획공연 등 공연 영상을 많이 남기려 한다. 이르면 올 연말부터 누구나 이런 콘텐츠를 최소한의 비용이나 무료로 즐길 수 있는 플랫폼을 개발 중이다.”
―공연 영상화 사업은 예술의전당과 우리 예술을 세계에 널리 알리는 데도 기여할 것 같다.
“그렇다. 우리나라에 예술 인재가 많은데 해외에서 활동하는 게 쉽지 않다. 예술의전당이 (세계적 클래식 전문 방송인) ‘유니텔 클래시카’ 등 해외 채널과 계약해 이들의 공연·작품 영상을 소개한다면 해외 진출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예술의전당 공연장이 해외 시청자들의 눈길을 끌면서 그 자체로 이슈가 될 수도 있다. (그런 맥락에서) 도이치그라모폰과도 공연영상 공동제작 방안 등을 협의 중인데 서로 긍정적이어서 조만간 가시화할 것 같다.”
―새 비전을 안정적으로 추진할 수 있을지, 미술관과 서예관은 어떤지도 궁금하다.
“예술이 돈이 되진 않으니 손해 안 보면 다행인 실정이다. 예술의전당 전체 예산 중 국고 지원은 30%에 그쳐 70%를 자체 수입으로 충당해야 한다. 예술의전당에 대한 국가적 기대치는 높은데 지원이 굉장히 작아 아쉽다. 꼭 필요한 예술사업도 제대로 펼치기 어려울 수 있다. 개관 후 (예산 문제 등으로) 한 번도 손질하지 못해 노후한 미술관이 큰 문제다. 미술관 리모델링을 우선순위로 고려하고 있다. 서예관도 관련 예술가·전문가와 만나 활성화 방안을 논의 중이다.”
―어떤 사장으로 기억되고 싶은가.
“내부에선 소통을 잘한 리더로, 외부에선 예술의전당 본연의 모습을 많이 찾아준 ‘예술가 기관장’으로 기억됐으면 한다.”
◆장형준 사장은 …
●1962년 서울 출생 ●1986∼1992년 미국 맨해튼 음대 피아노과 학사·석사·박사 ●1995년 서울대 음대 피아노과 교수 ●2005~2009년 스코틀랜드 국제 피아노 아카데미 예술감독 ●2008~2017년 서울대 국제 피아노 아카데미 조직위 위원 ●2009~2020년 클리블랜드·더블린·본 베토벤·에네스쿠·서울 국제·에피날 모스크바 등 국제 피아노 콩쿠르 심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