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내고 그대로, 더 늦게 받는’ 국민연금 개혁 밑그림이 나왔다. 재정 안정을 위해 보험료율(9%)을 15% 이상으로 올리고 연금을 받기 시작하는 나이, 기금운용수익률을 조정하는 게 핵심이다. 다만 정부 자문기구 내 위원들 간 의견 차이로 소득보장을 강화하는 소득대체율 인상안이 보고서에서 빠졌다는 한계가 있다. 개혁 방향은 보여줬지만 특정 방안을 제시하진 못해 개혁 추진 동력이 떨어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국민연금 재정계산위원회는 1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제5차 국민연금 재정계산 공청회’를 열고 국민연금 제도와 기금운용 개선 방향을 발표했다. 국민연금법에 따라 정부는 5년마다 재정 건전성을 살피고 제도 개선방안을 수립해야 한다. 전문가로 구성된 위원회는 이번 5차 재정계산 재정안정지표를 ‘장기재정추계 기간(70년) 적립기금 유지’로 설정했다. 미래 평균 수명을 고려해 올해 20세 가입자가 2093년 90세가 될 때까지 기금이 소진되지 않아야 재정이 안정됐다고 평가할 수 있다는 의미다. 연금제도를 그대로 유지하면 기금은 2055년 고갈된다.
두 가지 재정안정 방안을 냈던 제4차 재정계산 때와 달리 이번 보고서엔 여러 대안을 나열했다. 위원회는 △보험료율을 12%, 15%, 18%로 인상하는 방안 △2033년 65세가 되는 수급개시연령(올해 63세)을 66세, 67세, 68세로 올리는 방안 △추계기간 기금운용 연평균 수익률(4.5%)을 0.5%포인트, 1%포인트 높이는 방안을 각각 제시했다. 이를 조합하면 모두 18가지 시나리오가 나오는데 재정안정지표에 맞는 시나리오는 5가지뿐이다.
1안은 보험료율을 15%로, 수급개시연령은 68세로 올리고 기금투자수익률을 1%포인트 높이는 방안이다. 이를 위해 2025년부터 매년 0.6%포인트씩 보험료율을 인상하고 수급개시연령은 2033년 이후 5년마다 1세씩 조정해야 한다. 수급개시연령 조정의 경우 정년연장 등 고령자 계속고용 정책과 함께 진행해야 한다는 게 위원회의 설명이다.
나머지 방안은 모두 보험료율을 18%로 올리고, 수급개시연령 68세 상향 또는 기금운용수익률 제고(0.5%·1%포인트) 중 하나 이상을 조합하면 된다. 보험료율은 2025년부터 15년간 0.6%포인트씩 올리는 방안이다. ‘보험료율 12%’ 인상안에선 어떤 조합으로도 추계기간 기금이 유지될 수 없었다.
기금운용수익률을 제고하는 방안으로 기금운용발전전문위원회는 기준포트폴리오 도입 등을 제안했다. 국내·국외 주식, 국내·국외 채권, 대체투자 등의 비중을 설정하는 현재의 전략적 자산 배분이 아닌 위험자산과 안전자산의 투자 비율을 정해 유연성을 높이는 방안이다. ‘내는 돈과 받는 돈’을 조정하는 모수개혁 수준에 따라 기금운용 목표수익률을 설정하고 45% 수준인 위험자산 비중을 높이는 게 골자다.
위원회는 ‘용돈 연금’이란 비판을 받는 연금의 노후소득보장 기능을 개선하는 세부안도 제시했다. 59세로 고정된 의무가입상한연령을 장기적으로는 수급개시연령과 일치시키는 방안, 40∼60%인 유족연금 지급률을 60%로 일원화하는 방안, 연금 가입 기간을 늘려주는 크레딧 제도를 확대하는 방안도 제시했다. 둘째가 아닌 첫째 출산부터 12개월씩 크레딧을 주는 것과 군 복무 크레딧을 6개월에서 전체 복무기간으로 확대하는 등이다. 대부분 지난 재정계산 때도 제기됐던 개선방안들이다.
노후소득보장의 핵심축인 소득대체율 인상안은 이번 보고서에 포함되지 않아 ‘반쪽짜리’ 개혁안이란 지적이 나온다. 당초 위원회 보고서에는 보험료율을 12%, 15%로 올리되 소득대체율(2028년까지 40%로 하향)도 45%, 50%로 높이는 방안이 담길 예정이었으나 마지막에 삭제됐다. 소득대체율 유지안을 다수안, 인상안을 소수안으로 나누는 데 위원들 간 이견을 좁히지 못해서다. 인상안을 제시한 위원 두 명은 공청회 전날 사퇴했다.
기초연금과 퇴직연금 등 연금체계를 재설정하는 것과 관련해선 구체적인 방안 없이 방향만 제시했다. 65세 이상 소득 하위 70%에게 주어지는 기초연금 대상자를 소득·자산 수준을 고려한 일정 기준에 따라 선정하는 식이다. 정부는 모수개혁에 집중하고 구조개혁 방안은 국회 연금개혁특별위원회가 논의 중이다.
보건복지부는 위원회가 제시한 방안들을 검토해 다음 달까지 정부 최종안을 국회에 제출해야 한다. 위원회가 특정 개혁 방안을 제시하지 않은 데다 보험료율 인상 폭은 높은데 소득대체율 인상안은 빠지면서 국민연금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하기까지 상당한 진통이 예상된다. 보험료율을 25년간 단 1%포인트도 못 올렸는데 내년 총선을 앞두고 국회가 민감한 연금개혁을 제대로 추진하기 어려울 것이란 우려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