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호화폐가 바꾸는 돈과 금융의 미래는…

블록체인으로 대표되는 디지털 혁신
일각 2030년 전 실물화폐 종말 예언 속
금융시스템·달러·은행 역할 변화 조망

암호화폐, 교환수단 보다 ‘디지털 금’처럼
자산으로 각광… 실제 달러 대체 아직 요원

신뢰 대체할 더 완벽한 기술 구현 없이는
주요국 중앙銀 통화정책·규제 유지 전망

화폐의 미래/에스와르 프라사드/이영래 옮김/김영사/2만9800원

“나는 신뢰할 수 있는 제3자가 없는 완전한 P2P 방식의 새로운 전자 현금 시스템을 개발했다.”

2008년 가을 사토시 나카모토라는 이름의 사용자가 온라인 블로그에 올린 9쪽짜리 제안서에서 비트코인의 신화는 시작됐다.



당시 글로벌 금융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미 연방준비제도(Fed·연준)는 양적완화를 시작했고, 대규모 재정적자로 공공 부채가 5조달러 넘게 증가했다. 이런 조치는 경제가 회복되더라도 심각한 인플레이션이 발생해 달러 가치가 폭락할 것이라는 공포를 심었다. 미국 정부와 중앙은행, 금융기관에 대한 신뢰가 흔들리던 그때, 미국이 적대국의 제재수단으로 활용하는 달러 중심의 국제 금융시스템에 대한 다른 국가들의 불만이 끓어오르던 완벽한 타이밍에 비트코인이 새로운 대안으로 등장한 것이다.

 

정부나 은행에 의지하지 않고 거래할 수 있는 익명의 교환수단으로서 비트코인이 가진 매력은 시대정신에도 부합했다. 게다가 경기 부양을 위해 중앙은행이 돈을 마구 찍어내며 가치가 떨어지는 화폐와 달리, 공급이 특정한 양(2100만개)으로 제한된 비트코인은 그 가치가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 속에 추종세력이 급속도로 늘었다.

2015년 말 400달러에 거래되던 비트코인은 급등, 급락, 반등, 폭락을 거듭하며 최근 2만6000달러대를 횡보하고 있다. 비트코인 외에도 시가총액이 100만달러 이상인 암호화폐는 약 1700종(2021년 5월 기준)에 이른다. 2018년 스웨덴 중앙은행 부총재 세실리아 스킹슬리는 “2030년 이전에 마지막 지폐가 은행으로 되돌아올 것”이라며 실물화폐의 종말을 예언하기도 했다.

에스와르 프라사드/이영래 옮김/김영사/2만9800원

신간 ‘화폐의 미래’는 이처럼 암호화폐 기반인 블록체인으로 대표되는 디지털 혁신이 금융 시스템과 달러의 위상, 화폐권력을 쥐고 있던 정부와 중앙은행의 역할에 어떤 변화를 몰고올지를 조망한다.

국제통화기금(IMF)과 브루킹스연구소 출신 국제금융 전문가인 저자 에스와르 프라사드 교수는 “비트코인의 천재성은 무(無)에서부터 교환수단과 가치저장 역할을 동시에 수행할 수 있는 디지털 자산을 만들어냈다는 점에 있다”고 말한다.

달러화를 우월한 지위에서 끌어내리려는 전 세계 정부 지도자와 관료들의 열망은 대안적인 안전자산에 대한 탐색으로 수렴됐고 이런 욕구는 암호화폐와 관련 기술 개발의 연료가 됐다. 페이스북(현 메타)은 ‘리브라’(이후 ‘디엠’으로 명칭 변경)라는 암호화폐를 만들었고, 중국을 비롯한 각국도 앞다퉈 중앙은행디지털화폐(CBDC)를 만들기 시작했다.

민간기업과 중앙은행까지 디지털화폐 개발에 뛰어들자 ‘현금 없는 세상’이 임박한 듯했지만, 현금의 종말은 그렇게 빨리 오지 않을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현금은 탈세, 자금세탁 등 각종 불법적인 활동에 악용되기도 하지만, 여전히 거래의 익명성과 프라이버시 보호 등 디지털 화폐와 비교할 수 없는 강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노인, 외딴 지역 거주자 등 디지털 기술을 쉽게 이용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현금은 여전히 필수적이기도 하다. 뉴욕시의회 등 미국의 몇몇 주들이 현금 거부를 금지하는 법안을 시행하는 이유다.

암호화폐가 추종론자들의 기대처럼 달러화를 위협하고 지배적인 통화가 되는 것은 아직은 요원해 보인다.

러시아 브라츠크의 암호화폐 채굴 농장. 김영사 제공

암호화폐는 정부나 금융기관의 개입 없는 교환수단의 역할을 하기 위해 등장했지만, 심한 변동성과 거래 편의성 부족으로 소매거래 활용에 한계를 드러냈다. 또 제한된 공급 때문에 결제보다는 ‘디지털 금’과 같은 가치저장의 수단으로 더 각광받고 있다. 암호화폐가 거래소를 통한 해킹과 다수의 공격에 취약성을 드러내면서 정부의 감시 욕구를 자극해 ‘익명성’이라는 암호화폐의 신뢰 기반 역시 흔들렸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다만 이는 암호화폐에 대한 환멸보다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다양한 대안적 암호화폐의 탄생으로 이어지며 진보하고 있다.

저자는 통화가 지배적인 영향력을 갖기 위해 중요한 요건 중 하나는 ‘깊이’라고 강조한다. 그 통화로 표시된 금융자산이 대량으로 존재해 중앙은행 같은 공식 투자자와 개인 투자자 모두 그 자산을 쉽게 취득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미 연준이 필요할 때 얼마든지 돈을 찍어낼 수 있다는 것은 달러화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동시에 그 가치를 고착화한다.

또 다른 요건은 ‘유동성’이다. 금융위기에도 거래가 원활하게 이뤄질 만큼 충분한 수의 매수자와 매도자가 있다는 확신, 즉 신뢰가 있어야 하며 신뢰는 강력한 제도적 틀로 뒷받침되어야 한다.

따라서 각국의 열망에도 달러가 대체 결제 통화와의 경쟁에서 타격받을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오히려 유로화와 영국 파운드화, 일본 엔화와 같은 통화의 점유율이 하락하고, 소규모 개발국가가 큰 영향을 받을 수 있다.

금융의 기반인 신뢰를 대체할 더 완벽한 기술이 구현되지 않는 한 주요 경제국 중앙은행의 통화정책 및 규제 기능 역시 유지될 가능성이 더 높다고 저자는 말한다. 암호화폐든 혁신적인 금융상품이든 정부의 감독과 규제에서 비롯되는 신뢰를 토대로 삼았을 때 효과적으로 작동한다는 것이다. 그 근본적 이유에 대한 이 한 문장이 어쩌면 책을 관통하는 주제일지 모르겠다.

“결국 기술은 인간의 본성을 당해낼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