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니 독립영웅 ‘양칠성’ 다룬 영화 제작…한류스타 김범 주연 [박종현의 아세안 코너]

수교 50주년 즈음해 ‘제2의 고향’ 제작
지방정부·이상덕 대사와 면담에서 확인
양칠성은 1975년 외국인 독립영웅 추서
3개국 이름 지녔던 삶·묘비엔 한국 이름

바다는, 크레파스보다 진한, 푸르고 육중한 비늘을 무겁게 뒤채면서 숨을 쉰다. 중립국으로 가는 석방 포로를 실은 인도 배 타고르호는, 흰 페인트로 말쑥하게 칠한 3000톤의 몸을 떨면서 물건처럼 빼곡히 들어찬 동중국해의 훈김을 헤치며 미끄러져 간다.

 

1960년 4·19혁명 이후 발표된 최인훈의 소설 ‘광장’은 이렇게 시작된다. 주인공 이명준은 (불교에 심취한 작가 최인훈이 꿈꿨을 법한 이상세계) 중립국 인도로 가는 배를 타고 가다가 전쟁에서 죽은 사랑하는 가족을 생각한다. 그러다가 바다에 몸을 던진다. 밀실과 광장으로 상징되는 남북의 현실에 환멸을 느끼며 중립국을 찾아 나섰지만, 중도에 여정을 멈춘 셈이었다. 남북의 현실에 실망했던 주인공이 한국인 정체성에 실망한 만큼 조국을 향한 갈망도 컸던 가운데 선택한 길이기도 했다.

네덜란드 군대에 체포된 이후의 양칠성(왼쪽)의 모습. 더띡자바르 제공

◆ ‘따나 아이르 끄두아’…“양국 관계 실질적 증거”

 

소설 속에서 이명준은 아버지의 월북으로 빨갱이로 손가락질 받다가 혈육을 찾아 월북한다. 월북 이후 인민군으로 전쟁에 참전했다가 포로가 된다. 포로 신세에서 그가 선택한 것은 남과 북, 어느 쪽도 아닌 제3국이었다.

 

전쟁은 이렇게 개인에게는 세상 전체일 수도 있는 삶의 공간과 방향을 온전히 바꿔버린다. 아세안 코너를 연재하면서 전후문학의 백미 ‘광장’을 떠올린 이유는 있었다. 인도네시아에서 독립영웅으로 불리는 양칠성(梁七星)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제2의 조국’(Tanah Air Kedua)이 제작된다는 소식을 접해서였다. 한국, 일본, 인도네시아 3개 언어로 된 이름을 지녔던 비운의 조선 청년 양칠성의 삶에서 광장의 이명준의 삶을 겹쳐서 그려 본 것이다.

 

인도네시아 서부자바주 가룻군에 따르면 양칠성의 일대기를 다룬 ‘제2의 조국’은 10월부터 본격적으로 촬영이 시작된다. 이같은 사실은 지난 8월 말 이뤄진 이상덕 주인도네시아 대사와 가룻군의 루디 구나완 군수의 면담에서 확인됐다. 외교관계 수립 50주년의 의미를 되새기고 있는 양국이 협력관계를 공고화하는 가운데 인도네시아 독립영웅 양칠성의 일생을 다룬 영화 제작에 적극 협력하기로 한 것이다.

인도네시아 서부자바주 가룻에 있는 인도네시아 독립영웅 양칠성의 묘비에 한글 이름이 새겨져 있다. 더띡자바르 제공

◆ 배우 김범, 1일 인도네시아로 출국

 

콤파스 등 인도네시아 언론은 배우 김범이 주연배우로 참여해 양칠성 역할을 맡을 것이라고 전했다. 김범은 미니시리즈 ‘꽃보다 남자’, 시트콤 ‘지붕뚫고 하이킥’. 미니시리즈 ‘로스쿨’, 영화 ‘조선명탐정: 흡혈괴마의 비밀’ 등 여러 작품에 출연했다. 그는 1일 인도네시아로 출국했다.

영화 ‘제2의 조국’에서 주연 배우로 활동할 김범(왼쪽)과 양칠성의 아내 역할을 할 인도네시아 배우 마우디 아윤다의 모습. 세계일보 자료사진·더띡닷컴 제공

양칠성의 아내였던 인도네시아 가룻 출신 와나라자 역할은 그의 아내와 같은 지역 출신인 마우디 아윤다가 맡기로 했다. 배우들은 한국과 인도네시아 양국을 오가면서 영화 장면을 촬영하게 된다. 마우디 측 소속사는 영화 촬영 등과 관련해 공식 입장을 표명하지 않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이 5∼8일 아세안정상회의와 양국정상회담 등 위해 자카르타를 방문하는 점을 고려할 때, 이번 영화 제작과 관련된 사안이 언급될 수도 있다.

 

정부와 영화진흥 부문의 지원을 받을 영화 제작에 대해서는 인도네시아 언론은 긍정적인 보도를 이어가고 있다. 조코 위도도(조코위) 대통령의 지지를 받는 것으로 분석되고 있는 야당 대선후보인 프라보워 수비안토 국방장관도 적극적인 환영의사를 표명했다. 루디 군수는 “깊이 있는 내용과 양국 협력을 토대로 제작될 ‘제2의 조국’이 역사 존중과 문화 관계 강화를 위한 한·인도네시아 관계의 실질적인 증거가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인도네시아 대선은 내년 2월에 치러지며, 한·인도네시아 양국은 18일 외교관계 수립 50주년을 맞는다.

이상덕 주인도네시아 대사(오른쪽)와 서부자바주 가룻의 루디 구나완 군수가 지난 8월 25일 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가룻군 제공

◆ 동료·한인들의 노력…다층적이지만 복원된 양칠성의 삶

 

양칠성은 1919년 5월 29일 전북 완주에서 태어나 일제에 징집됐다가 1942년 인도네시아 자바섬 반둥에 배속됐다. 조국을 잃은 조선에서 태어난 양칠성은 일제의 강제 창씨개명 때문에 야나가와 시치세이(梁川七星)로 수년 동안 살아가야 했다. 2차세계대전 이후엔 인도네시아식 이름 코마루딘(Komarudin)으로 불리었고, 현지여성과 결혼을 해 아들도 뒀다. 코마루딘의 뜻은 ‘인도네시아를 비추는 달’이다.

 

일본의 패망 이후 양칠성은 인도네시아에 다시 돌아온 네덜란드에 저항한 현지인들의 독립투쟁에 참여했다. 폭파 전문가로 활동하며 인도네시아 독립 저항운동 과정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 여러 활약을 펼쳤지만, 네덜란드 군대에 잡혀 1949년 8월 10일 처형됐다.

 

양칠성의 사망 시기와 관련해 더띡닷컴 등은 당시 기록을 전한 일부 기사을 인용해 1949년 5월 21일 숨진 것으로 언급돼 있다고 보도했다. 더띡닷컴은 양칠성이 처형될 당시 ‘머르데카’(독립)를 2차례 외친 영웅이었다고 전했다.

 

피식민지 조선에서 태어나 식민 지배국 군속의 삶을 원치 않았을 양칠성은 제3국의 독립을 도왔다가 40년의 생을 접어야 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비운의 삶은 옛 동료의 증언과 인도네시아 거주 한인 및 사학자들의 연구, 양국 정부 등의 노력에 힘입어 복원의 과정을 거치게 됐다. 1975년 인도네시아 정부의 외국인 독립영웅으로 추서됐으며, 20년 뒤인 1995년엔 묘비명에 한국인 이름 양칠성이 병기될 수 있었다. 이후에도 그에 관한 연구가 이어진 덕분에 다큐멘터리가 만들어지고 학술대회가 개최됐다. 양국 수교 50년을 맞아서는 영화까지 제작되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