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벨 뒤의 진실/캐서린 에반/조은아 옮김/시공사/2만4000원
1980년대 후반 아프리카에서 하루 5000명 이상이 에이즈로 사망하고 몇몇 국가에서는 인구 4분의 1이 감염됐다. 인도에서도 뭄바이 홍등가에 에이즈가 들끓어 뭄바이는 ‘인도 에이즈의 수도’로 불렸다. 에이즈 발병을 늦추는 유일한 치료제 아지도티미딘(AZT)은 1인당 연간 8000달러 정도 들어 아프리카에선 엄두를 내지 못했다. 1993년 인도의 제약사 시플라(Cipla)는 AZT의 10분 1도 안 되는 가격에 제네릭(복제약)을 개발했으나, 특허권을 보호하려는 거대 제약사들의 반발에 부딪혔다. 그러나 시플라의 CEO 유수프 박사는 활동가와 언론인들의 지지 속에 미국 식품의약국(FDA)으로부터 AZT 제네릭을 승인받아 국경없는의사회에 하루 1달러에 제공했다. 이를 계기로 아프리카에 합리적인 가격으로 판매되는 제네릭 의약품은 FDA 검토 혜택을 얻을 수 있었고, 인도의 또 다른 제약사 란박시(Ranbaxy)는 그 혜택을 받아 거대 제약사로 성장했다.
그러나 란박시가 아프리카에 수출한 제네릭 약품들은 효과가 거의 없거나 치명적인 후유증을 야기했다. 미국에서도 제네릭 약품을 먹고 부작용을 호소하는 사례가 잇따랐다.
신간 ‘라벨 뒤의 진실’(원제 Bottle of Lies)은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공중보건 혁신이라 불린 제네릭이 어떻게 가장 추악한 사기로 전락했는지를 추적한 책이다.
책은 세계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FDA의 실패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또 인도와 중국 제약사들이 규제가 허술한 가난한 나라에는 값싼 불순물이 함유되고 약효가 떨어지는 의약품을 보낸 실태를 통해 저렴한 가격으로 개발도상국의 수백만 환자를 살려냈다는 ‘과학의 승리’의 추악한 이면도 보여준다.
탐사보도 전문기자인 저자 캐서린 에반은 다국적 제네릭 기업의 사기 행각을 추적하기 위해 인도, 중국, 가나, 영국, 아일랜드, 멕시코, 미국 전역에서 기업의 임원과 내부고발자, 의약품 조사관, 공중보건 전문가, 의사, 검사 등 240명 이상을 인터뷰하고, FDA 내부 문건 2만여건을 비롯해 제네릭 기업들의 내부 자료 수천 건, 비공개 법원기록 등의 기밀문서를 입수해 분석했다.
방대한 조사와 끈질긴 취재를 바탕으로 부패한 제네릭 산업과 소비자를 보호해야 할 규제기관의 실패를 파헤친 탐사보도 걸작이자, 디스토피아 의학 스릴러라 부를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