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더이상 음악이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나의 직접적인 문제가 돼버렸어요. 예를 들어 베르디의 ‘레퀴엠’을 연주한다면 유명한 걸작이어서 하는 게 아니라 당연히 (전쟁) 희생자들을 생각하며 연주하게 됩니다.”
우크라이나를 대표하는 여성 지휘자 옥사나 리니우(45)는 ‘지난해 초 발발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음악관이 달라졌냐’는 질문에 “그렇다”며 이렇게 말했다. 첫 내한무대를 닷새 앞둔 12일 서울 예술의전당 N스튜디오에서 기자들과 만난 리니우는 “전쟁으로 친구가 죽고, 건물이 무너지고, 매일 죽음을 경험하니까 그걸 멈추게 하고 싶었다”며 “어떻게 사람을 없애려 할 수 있는지, 한 나라가 다른 나라를 폭격할 수 있는지, 그것 자체가 이해가 안 된다”고도 했다.
전 세계에 전쟁의 참상과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는 데 적극 목소리를 내온 리니우는 지난해 이탈리아 볼로냐 시립극장 259년 역사상 최초의 여성 음악감독으로 취임하는 등 여성 지휘자로 새 역사를 써내려가고 있다. 2004년 구스타프 말러 국제 지휘콩쿠르에서 3위에 오른 그는 독일 뮌헨 바이에른 국립오페라에서 키릴 페트렌코의 보조지휘자, 오스트리아 그라츠 오페라와 필하모니 상임지휘자를 지냈다. 또 객원지휘자로 베를린 슈타츠카펠레,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 뮌헨 필하모닉 등 세계적인 교향악단과 무대에 올랐다. 특히, 2021년 독일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서 이 축제 145년 역사상 최초의 여성 지휘자로 데뷔 무대(바그너의 ‘방황하는 네덜란드인’)를 성공적으로 마치며 세계 클래식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2016년 우크라이나 청소년 교향악단을 만들어 예술감독까지 맡는 등 모국에 대한 애정이 각별한 리니우는 오는 17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선보일 내한 공연 첫곡으로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와 함께 자국 작곡가 예브게니 오르킨(46)의 ‘밤의 기도’를 들려준다. 그가 오르킨과 작업해 만든 이 음악은 전쟁 희생자들을 기리는 곡으로 지난 3월 독일 베를린에서 우크라이나 청소년 교향악단과 세계 초연했다.
13∼23세 청소년으로 구성된 이 악단은 피난민처럼 유럽을 떠돌며 공연하고 있다. 전쟁 중 살해당한 우크라이나 시인이 쓴 시를 가사로 한 칸타타를 최근 벨기에 브뤼셀에서 우크라이나 합창단과 공연하기도 했다.
리니우는 “(연주)투어 일정으로 독일에서 2주간 지낼 때, 단원 중 14살 바이올리니스트가 있었는데, 여기(독일)에 와서 뭐가 좋으냐고 물으니 ‘안전하게 지낼 수 있어서 좋다’고 답했다”며 “키이우에서 온 이 친구가 ‘최근 일주일간 공습이 없던 날이 하루도 없었다. 방공호에 숨어 지내지 않고 친구들과 연주할 수 있어 좋다’고 했다”고 전했다.
그는 이어 “단원들을 보면 아버지가 전사하고, 집이 폭격당해 없어지는 등 가슴 아픈 이야기들을 갖고 있다”며 “나 역시 전쟁 이후 한 번도 우크라이나를 방문하지 못했다. 어머니와 통화하면 우실 때가 많다. 끔찍하고 슬픈 상황”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예술은 단순한 오락의 도구가 아니라 세계에서 당장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성찰이다. 그 문제에 관해 이야기하고, 질문하고, 답을 구하는 과정”이라며 “예술은 그 자체가 영혼을 치유하는 힘이 있다”고 덧붙였다.
다만 리니우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한 비판으로 차이콥스키, 스트라빈스키, 라흐마니노프 등 러시아 작곡가들의 작품을 배척해야 한다는 주장들에 대해선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작곡가들의 작품은 한 나라에 속한 것이 아니라 세계가 공유하는 인류 유산이에요. (러시아 대통령) 푸틴의 음악이 아닙니다. 오래전 돌아가신 분들의 음악을 국가별로 나눠 배제하는 건 옳지 않다고 봐요. 라흐마니노프도 지금 살아있다면 이 전쟁과 푸틴에 대해 분명히 반대했을 겁니다.”
그는 이번 공연 대미를 장식할 곡으로 라흐마니노프의 교향곡 2번을 고른 것과 관련, “이 곡은 단테의 ‘신곡’을 연상하게 한다. 개인적으로 영혼의 구원과 연대를 통한 구원 등의 메시지를 전하는 ‘신곡’에 영감을 많이 받았다”며 “세계에는 빛과 어둠처럼 선과 악이 있고, 중간은 없다. 우리는 끊임없이 선과 연결되는 것을 찾아야 한다. 미래에 대한 중요한 질문”이라고 설명했다.
리니우가 이번에 아르메니아 출신 바이올리니스트 세르게이 하차투리안(38)과 손잡고 들려줄 러시아 작곡가 아람 하차투리안(1903~1978)의 바이올린 협주곡은 우크라이나 항구도시 오데사에 있는 사람들에게 바치는 곡이라고 한다. 그는 “최근 폭격으로 오데사 음악원 건물이 망가지고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건물도 손상을 당했다. 많은 것이 파괴되는 걸 보는 건 끔찍한 경험”이라며 “이것에 대해 사람들이 의식할 수 있도록 예술가들은 평화의 메시지를 내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리니우는 남성들이 주도권을 쥔 보수적인 클래식 음악계의 ‘유리천장’을 깨부숴온 인물로도 평가받는다. 그는 “지금은 여성 지휘자들이 제법 보이지만, 내가 학생이었을 때는 여자가 나혼자뿐이었다. 교수도 모두 남자였다”며 “하지만 최근에는 국제 무대에서 성공한 여성 지휘자가 많이 나오고 있다. 독일에서 한국의 여성 지휘자 김은선(미국 샌프란시스코오페라 음악감독)과 함께 공부한 적도 있다”고 말했다. 이어 “나도 여성 부지휘자를 키우고 있다. 여성 지휘자들을 지원한다는 의미”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