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병주의역사저널] 한반도는 지진 안전지대였을까?

조선왕조실록에 ‘지진’ 1900건 나와
발생지역·강도·피해 등 상세히 기록

최근 모로코에서 일어난 대지진의 참사는 자연의 재앙 앞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의 한계를 느끼게 한다. 우리가 사는 한반도는 지진의 중심권에서는 벗어나 있어서 지진으로 인한 대참사는 겪지 않았지만, 완전히 안전지대는 아니었다. 현존하는 최초의 역사서인 ‘삼국사기’에서부터 지진에 관한 기록이 보이며, ‘조선왕조실록’에 ‘지진(地震)’이라는 검색어를 입력하면 1900건이 나온다. 지진이 가장 빈번했던 시기는 16세기 중반의 중종(88건) 재위 기간과 17세기 후반∼18세기 초반 숙종(164건) 재위 기간이었다.

인조에서 순종까지 왕의 비서실에서 쓴 기록인 ‘승정원일기’에도 총 783건의 지진 기록이 보이는데, 역시 숙종 대가 319건을 차지할 정도로 지진 발생이 빈번했음을 보여 준다. 실록에서 지진에 관한 첫 기록은 1393년(태조 2) 1월29일 “지진이 있었다”는 기록이며, 1405년(태종 5) 2월3일의 ‘태종실록’에는 “경상도 계림(鷄林: 경주), 안동 등 15개 고을과 강원도 강릉, 평창 등지에 지진이 있었다. 유사(有司: 담당 관리)에게 명하여 계림, 안동 등처에 진병 별제(鎭兵別祭)를 행하게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신병주 건국대 교수·사학

지진의 발생 지역과 함께 지진이 일어나면 군사들을 모아 놓고 특별 제사를 지냈음이 나타난다. 지진이 자주 일어났던 중종 시대인 1518년(중종 13) 5월15일에는 중종과 신하들이 회의하는 현장에서 지진을 느낀 기록이 보인다. “유시(酉時: 오후 6시쯤)에 세 차례 크게 지진이 있었다. 그 소리가 마치 성난 우렛소리처럼 커서 인마(人馬)가 모두 피하고, 담장과 성첩(城堞)이 무너지고 떨어져서, 도성 안 사람들이 모두 놀라 당황하여 어찌할 줄을 모르고, 밤새도록 노숙하며 자신의 집으로 들어가지 못하니, 노인들이 모두 옛날에는 없던 일이라 하였다. 팔도가 다 마찬가지였다”고 기록해 당시 지진의 심각성을 알리고 있다.



당시 현장에 있던 조광조도 그의 문집인 ‘정암집’에서 “(1513년) 5월16일에 상이 친히 정사를 보는데 지진이 세 번 일어났다. 전각 지붕이 요동을 쳤다”고 하여 이날의 지진 상황을 기록하고 있다.

지진이 일어나면 왕들은 자신의 책임임을 통감하였다. 중종은 자신이 정치를 잘못한 것이 지진의 원인이 됐는지를 걱정하였고, 1594년 한양에 지진이 일어나자 선조는 지진을 부덕의 소치로 생각하고 왕세자인 광해군에게 왕위를 물려줄 뜻을 보이기도 했다.

지진이 빈번하게 일어났던 숙종 시대에도 여러 차례 지진 피해 상황이 기록돼 있다. 1681년(숙종 7) 5월7일의 ‘숙종실록’에는 “강원도에서 지진이 일어났는데, 소리가 우레와 같았고 담벽이 무너졌으며, 기와가 날아가 떨어졌다. 양양에서는 바닷물이 요동쳤는데, 마치 소리가 물이 끓는 것 같았고, 설악산의 신흥사 및 계조굴의 큰 바위들이 모두 붕괴했다. (중략) 평창, 정선에서도 또한 산악이 크게 흔들려서 암석이 추락하는 변괴(變怪)가 있었다. 이후 강릉, 양양, 삼척, 울진, 평해, 정선 등의 고을에서 거의 10여 차례나 땅이 흔들렸는데, 이때 팔도에서 모두 지진이 일어났다”고 해 강원도뿐만 아니라 전국에서 지진이 일어난 상황을 알 수가 있다.

실록 기록을 보면 지진이 일어나면 진도(震度)가 약한 경우는 지진이 발생한 지역만을 기록했지만, 지진의 강도가 심하면 지진이 발생한 지역과 시간, 소리의 크기, 피해 정도까지를 상세히 기록하였음이 나타난다. 이처럼 실록에는 지진 발생 지역과 지진의 강도를 추론할 수 있는 기록들이 시기적으로 남아 있어서 미래의 지진 발생 상황을 예측하는 데도 활용할 수가 있다.

2011년 일본의 도호쿠 지방 대지진 참사와 이어진 후쿠시마 원전 폭발 사고를 통해서도, 원자력발전소 건설에는 무엇보다 내진(耐震) 시설이 중요하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실록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승정원일기’에는 1623년부터 1910년까지 288년간의 날씨가 거의 빠짐없이 기록돼 있어 장기적인 기후 예측에 반영할 수가 있다. 선조들이 남긴 철저한 기록 정신을 바탕으로, 인문학과 자연과학을 아우르는 통섭의 지혜가 필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