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 안 지면 빨간 줄…‘히트앤드런 방지법’, 왜 안 생기나요?” [심층기획-‘예고된 비극’ 영아유기]

⑦‘히트앤드런 방지법’이 제정되지 않는 이유
지난 6월 ‘수원 냉장고 영아 시신’ 사건을 계기로 이뤄진 정부 전수조사 결과, 2015년부터 8년간 출산 기록은 있지만 출생신고가 되지 않은 아동이 2123명에 달하는 것으로 파악됐다. 이 중 안타깝게 유기되거나 세상을 떠난 아기들의 사연이 사회에 충격을 안겼다. 세계일보는 영아유기·살해가 개인 일탈이 아닌 ‘사회 문제’라는 인식 아래 판결문을 분석하고, 영아의 생부모 사연을 심층적으로 추적했다. 이를 통해 드러난 영아유기·살해 범죄의 이면, 아동·여성 보호와 복지 시스템의 민낯을 특별기획 시리즈 ‘예고된 비극, 영아유기’ 연재로 소개한다.

 

본지가 한국미혼모가족협회, CJ나눔재단 등과 협력해 69명의 미혼모를 대상으로 실시한 심층 설문조사에서 미혼모들은 양육비를 국가가 대신 지급하고 비양육부모에게 구상권을 청구하는 ‘양육비대지급법’, 책임을 다하지 않는 생부를 처벌하는 내용 등을 포함한 ‘미혼부 책임법’ 도입에 69명 모두 찬성했다.

 

그러나 국회에서 관련법은 모두 본회의를 통과하지 못한 채 잠들어 있다. 영아살해죄를 폐지하고 일반 살인죄로 처벌을 강화하는 법안은 조속히 통과하는 동안 말이다.

 

이름부터 꽤 직관적인 ‘히트앤드런(Hit and run·치고 빠지기) 방지법’은 한때 한국에서도 논의된 적이 있다. 2018년 청와대 국민청원을 통해 소개된 이 법은 덴마크에서 시행 중인 것으로, 양육비대지급과 내용이 동일하다.

 

당시 청원자는 “덴마크에서는 아이 아빠가 매달 약 60만원 정도 보내지 않으면 시에서 엄마에게 상당한 돈을 보내준다. 그리고 아이 아빠 소득에서 세금으로 원천징수를 해버린다”고 썼다.

 

히트앤드런 방지법을 만들어달라는 이 청원은 2018년 2월23일부터 3월25일까지 총 21만7054명이 참여해 높은 관심을 보였다. 청원 동의 20만을 넘기자 정부는 “미혼부모 지원을 강화하겠다”는 원론적 답변을 했다.

 

이후 미혼모 지원이 늘어나긴 했으나 끝내 미혼부 책임의 법제화로는 이어지지 못했다. 언론 보도 역시 당시에만 흥미롭다는듯 기사가 쏟아지다가 2019년 이후로는 뚝 끊겼다.

 

한 달 만에 청원자 21만명을 돌파한 것 치고는 다소 맥 빠지는 결론이 아닐 수 없다. ‘지원보다 책임’에 방점을 둔 법안을 만들어달라 했는데 “지원을 늘리겠다”는 선언에 그치는 건 앙꼬 없는 찐빵 수준이다.

 

5년 전 이 청원에 참여했던 30대 여성 이성경씨는 취재진에 “당시 SNS에서 청원 참여 물결이 분명 있었다”고 전했다. 이씨는 “다른 여성들이 적어놓은 이기적 남성에 대한 경험담, 위험했던 연애의 예시 같은 걸 듣고 나니 공감이 안 될 수 없었다”며 “단지 내가 겪지만 않았던 것이란 걸 알게 되면서 이 법안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다만 그는 “애초에 정부가 무언가 하리라는 기대를 안했었다. 여성 대상 범죄보다 출산율에 먼저 관심을 보이는 정치인들에게는 이미 실망이 큰 상태였다”며 이후 법안이 흐지부지된 것이 놀랍지 않다는 반응을 보였다.

 

미혼모 은진은 미혼부 책임 법제화가 진전을 보이지 않는 데 대해 “이걸 했을 때 얻는 이익이 남자들로서는 본인들이 불이익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며 “미혼모 단체가 굉장히 소규모에다 숨어 있어서 이해나 법 관련 행동을 한 적 없는 것도 영향이 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책임지지 않는 남성을 처벌하는 법안이 생긴다는 건 상징적이다. 

 

민지는 “지금은 양육비 소송해도 ‘그냥 내가 안 주면 끝이지 뭐. 안 줘도 쟤(여성)가 뭐 못 해’ 이러고 넘어가는 사람들이 많다”며 “법의 실효성을 떠나 무언가 하나 있다는 인식만으로도 책임지지 않는 남성이 많이 줄 거라고 본다”고 했다. 안 주면 큰일난다, 망한다는 인식이 있어야 좀 바뀌지 않겠냐는 얘기다.

 

이런 법의 상징적 의미라도 있으면 여자 쪽에서도 좀 더 안심할 수 있을 거라고 민지는 말했다. ‘만약 양육비 안 주면 이 제도 쓰면 돼’라고 여유를 가질 수 있고, 지금처럼 ‘저 인간이 돈 안 주면 어떡하지’라는 근심 걱정에 시달리지 않아도 될 것이라고.

 

양육비와 책임지지 않는 남성 처벌 관련해 열심히 알아봤다는 은진은 “법안이 많이 발의는 됐는데 국회 문턱을 못 넘고 결국엔 다 흐지부지 됐다더라”며 한숨을 쉬었다. 이어 “엄마는 아기를 직접 데리고 있으니까 책임을 묻고, 아빠는 그냥 맨몸으로 빠져나가니 아무 처벌을 안 받는다는 게 되게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적어도 법적인 구속력이라도 생기면 훨씬 더 나아질 거라고 봅니다. 연락 안 하고 책임 안 질 경우 ‘징역 간다, 벌금 낸다, 빨간 줄 그어진다’고 하면 겁 먹지 않겠어요? 그랬으면 지금 제 아기 아빠도 분명히 이렇게까진 못 했을 거 같거든요.” 은진이 말했다.

 

사실 양육비대지급법의 효과에는 큰 이견이 없다. 결국 우선순위의 문제다.

 

양육 환경은 훨씬 좋아지겠지만 실제로 국가가 구상을 얼마나 하느냐, 돈을 받아내느냐의 문제에서 선택해야 한다. 구상이 안 되는 부분을 세수로 감당할 것이냐 말 것이냐. 아직까지 한국 사회는 후자인 상태다.

 

“우리가 세수 부담을 지더라도 실질적으로 양육비가 지급되도록, 그게 정말로 더 중요하다면 그런 선택을 할 수 있겠죠.” 윤 변호사가 말했다. 

 

그날은 언제 올까.

 

<관련 기사>

 

[심층기획 - ‘예고된 비극’ 영아유기]

 

프롤로그 - 유령아빠, 불행의 씨앗

 

https://www.segye.com/newsView/20230910509604

 

①[단독] 애 아빠 없이 ‘나홀로 출산’… “극도의 패닉 상태서 범행”

 

https://www.segye.com/newsView/20230910508352

 

②‘국가의 부재’ 속에 아기가 떠난 그날

 

https://www.segye.com/newsView/20230912500544

 

③벼랑 끝 내몰려 ‘아이 버릴 결심’ 하기까지

 

https://www.segye.com/newsView/20230913500163

 

④아빠가 먼저 ‘두 사람’을 버렸다…부양 점수 5점 만점에 1.3점

 

https://www.segye.com/newsView/20230913520264

 

⑤“엄마를 보호하는 게 영아 지키는 길”… ‘비정한 모정’ 다시 본 그 판사

 

https://www.segye.com/newsView/20230915500252

 

⑥“주민등록 말소, 이사 등 온갖 꼼수”… ‘도망간 아빠’ 찾아 삼만리

 

https://www.segye.com/newsView/20230915513897

 

⑦“책임 안 지면 빨간 줄…‘히트앤드런 방지법’, 왜 안 생기나요?”

 

https://www.segye.com/newsView/20230915513915

 

⑧외국인 미혼모와 ‘무등록’ 아동…“아이 성년 되면 생이별”

 

https://www.segye.com/newsView/20230919510570

 

⑨“가부장적 체류 제도가 ‘투명 아동’ 양산…핏줄·혼인 중심 틀 깨야”

 

https://www.segye.com/newsView/20230920510203

 

⑩‘살아남은 유기 영아’ 이야기…원가정도, 새 가정도 없다

 

https://www.segye.com/newsView/20230920512263

 

⑪“누구에게도 기댈 생각을 못해요”… ‘버팀목’ 없이 고립되는 청년

 

https://www.segye.com/newsView/20230922502617

 

⑫[좌담회] “예기치 않은 임신은 재난상황…생부에게 더 책임 물어야”

 

https://www.segye.com/newsView/20230922513086

 

에필로그 - 이중잣대에 지친, 미혼모들의 속마음

 

https://www.segye.com/newsView/202309245023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