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6월6일 아침 경남 함안 도항리에서 신문 배달 소년이 말이산 아파트 신축 공사장을 지나다 철 조각을 발견했다. 이 생선 비늘 모양의 철 조각은 다름 아닌 말 갑옷의 조각 편이었다. 신고를 받고 달려간 국립창원문화재연구소 조사단은 한쪽은 굴착기의 삽날에 반쯤 날아갔지만 한쪽은 완벽하게 남아 있던 말 갑옷 1개를 수습했다. 인근에서 둥근고리큰칼(환두대도)도 발견했다. 지금 국립김해박물관에 보관돼 있는 말 갑옷(보물 제2041호)은 이렇게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고, 한동안 침체했던 가야사 연구도 다시 활기를 찾기 시작했다. 말 갑옷이 발견된 무덤의 주인공은 4세기 후반 아라가야의 수장급으로 추정됐다.
가야는 기원 전후부터 대가야가 신라에 멸망하는 562년까지 한반도 남부에 있던 고대 정치체이다. 가야사(史)는 한국 고대사 연구에서 오랜 시간 푸대접을 받았다. 이는 ‘삼국사기’의 영향이 컸다.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편찬하며 가야사를 본기에서 빼고 서술했다. 가야는 그저 신라본기 속에 단편 기록으로만 존재한다. 삼국유사에는 6가야가 있었다고 돼 있지만, 금관가야의 기록인 가락국기 외에는 문헌이 남아 있지 않다. 가야가 고구려·백제·신라처럼 중앙집권체제가 아닌 연맹체에 머물렀던 한계도 분명히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