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단계’로 가는 발판 … 전시라는 무대 더 견고하게 다듬다 [박미란의 오프 더 캔버스]

윤율리·모두의 발돋움을 위한 전시

미술관 3년 차 학예팀장으로서 주어진 과제
미술관 특유 환경·자신의 기호 균형 맞추는 작업

2022년 소장품전 ‘다시 그린 세계…’ 인상적
정선·김정희부터 이응노·김기창 작품까지
한국화단 전통·현대 연결… 미학적 현실 조명

덕수궁 내외부 미술관 활용 ‘토끼 방향 오브젝트’
코로나 속 복잡한 시공 미술 방식으로 증언

작가·기관·비평가 등 다양한 참여자의 장
과거보다 나은 전시 만들기 위해 쉼 없이 분투

윤율리(35)는 지난 10여년 동시대 한국 미술 현장에서 활발히 활동해온 큐레이터다. 독일 바이에른 소재의 레겐스부르크대학교 철학과 졸업 후 귀국해 미술관학을 공부했다. 미술 분야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한 것은 학부 재학 당시 즈음이었다. 학창 시절의 친구들이 유난히 미술대학에 많이 진학하여 자연스레 미술을 가까이 접하게 됐다. 전공인 철학 분야에서 다루는 문제들이 미술의 영역에서 논의되는 방식이 흥미롭게 여겨지기도 했다.

독일과 한국 두 나라를 오가다 2010년경 이후로는 줄곧 서울에 머물렀다. 본격적으로 미술 현장에 몸담겠다고 결심한 적은 없었다. 그저 우연찮은 기회로 미술 전문지에 글을 기고하고, 때맞춰 관심 있는 전시기획에 참여하다 보니 어느덧 ‘윤율리’라는 이름 뒤에 ‘큐레이터’라는 명칭이 따라붙었다.

‘다시 그린 세계: 한국화의 단절과 연속’(2022) 전시전경. 추사 김정희와 오원 장승업의 작품. 정효섭, 일민미술관 제공

그가 쓴 글이 빛났고, 가담한 전시들이 주목받았다. 협력 큐레이터로서 참여한 첫 전시 ‘청춘과 잉여’(2014)를 시작으로 세종문화회관에서 연 ‘굿-즈’(2015)와 서울시립미술관의 ‘서울 바벨’(2016) 등 당시 청년작가들을 주축 삼아 진행된 주요 전시의 크레디트 목록마다 윤율리의 이름이 자주 올랐다. 대안공간 아카이브 봄의 시각예술 디렉터로 일했고, 글쓰기 회사 ‘윤율리 라이팅 코퍼레이션’의 책임 편집인으로서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망신스러운 문법 오류, 과도한 자아 확장, 영원히 흑역사가 될 할머니 시대의 철학 용어, 각종 하나 마나 한 소리로 점철된 글쓰기로부터 당신과 당신의 비즈니스를 지켜드립니다. 더 이상 순간의 잘못된 선택으로 고통받지 마세요”라는 소개 글을 내걸고 온라인 홈페이지를 통해 각종 원고를 의뢰받았다.

윤율리 큐레이터. 윤율리, 안상수 제공

국제다원예술축제 ‘페스티벌 봄’ 사무국과 국제 타이포그래피 비엔날레 ‘타이포잔치’의 출판팀, ‘아트 플랜트 아시아(Art Plant Asia, 총감독 이승현)’ 학예팀에서 근무하기도 했다. 에이전시 오로라(AURORA)의 멤버이자 큐레토리얼 플랫폼 웨스(WESS)의 공동 운영자다. 현재 일민미술관의 학예팀장으로서 근무하는 동시에 한성대학교 회화과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기관의 안팎에서, 오늘의 공기를 숨 쉬며

윤율리가 광화문 인근 일민미술관의 학예팀장으로 근무를 시작한 지 이제 3년차가 됐다.

“미술관에 소속되기 전이나 후나 어차피 일 중독자처럼 일만 한다”고 농담조로 말하다가도 “미술관을 직장으로 삼게 되면서 전시가 어떠한 방식으로든 교육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꾸준히 상기한다”며 진중한 직업정신을 드러낸다. 독립적으로 활동하던 시기와 달리 기관의 정체성과 소장품, 시의적 동향 등을 우선적으로 염두에 두고 주제를 설정한다. 연간 계획을 사전에 수립하고, 구체적인 일정표에 따라 체계적으로 업무를 수행한다. 미술관 특유의 환경과 자신의 기호 사이 적절한 균형을 찾아내는 일이 그에게 주어진 과제다.

최근 영국의 젊은 작가 이시 우드(Issy Wood, 30) 개인전 ‘아이 라이크 투 워치(I Like To Watch)’가 일민미술관에서 개막했다. 윤율리가 책임기획을 맡아 일민미술관 학예팀의 협업으로 마련된 전시는 회화를 중심 매체 삼아 재료 및 형식의 변주를 시도하는 작가의 작품세계를 다채롭게 선보인다. 미술관의 전시 서문에 쓰인 표현을 빌리면, 우드의 화면은 “고풍스러운 빈티지 사물, 젊은 세대가 열광하는 사치품, 성적인 은유, 스스로 겪은 이상한 순간”을 소재 삼아 “초현실주의와 결합한 새로운 리얼리즘의 전조”를 드러낸다. 리넨과 벨벳, 바닥면의 격자무늬 세라믹 타일 위에 그린 회화 작품 및 그로부터 파생된 설치와 영상 작품을 다채롭게 포괄하는 개인전이다. 개별 작품이 만들어내는 장면에 순간마다 몰입할 수 있도록 적절히 정돈된 공간 구성이 돋보인다. 이달 7일 개막한 전시는 11월12일까지 계속된다. 개막 이튿날인 8일에는 부대행사로서 아티스트 토크를 마련하여 우드의 작품세계에 관한 이해를 넓혔다. 작가 본인과 윤율리, 프라이머리 프랙티스 디렉터 김성우가 토크에 참여해 대화를 나누었다.

이시 우드 개인전 ‘아이 라이크 투 워치(I Like To Watch)’(2023) 전시전경.

일민미술관에서 기획한 전시 중 인상 깊은 사례로서 꼽은 ‘다시 그린 세계: 한국화의 단절과 연속’은 지난해 10월부터 올해 초까지 진행된 기획전이다. 처음 경험한 미술관 소장품전이자 한국화를 주제 삼은 전시였기에 사전 연구의 부담이 컸다. 전시는 미술관 수장고로부터 겸재 정선, 추사 김정희, 오원 장승업, 석파 이하응의 서화를 꺼내 왔다. 퇴계 이황, 신사임당, 율곡 이이, 이순신의 것으로 알려진 작품 또한 다수 선보였다. 이어 고암 이응노, 운보 김기창, 장우성, 서세옥 등 근현대 한국화가를 호명하는 한편 박웅규, 손동현, 배재민, 박그림 등 13인의 동시대 작가를 선별함으로써 한국화단의 전통과 현대를 연결짓는 자리를 마련하고자 했다. “과거와 현재를 망라해 한국화의 시각성을 드러내는 소장품과 현대미술을 그 근거로 제시”하는 일을 통해 “우리가 당면한 미학적 현실을 새롭게 모색”하고자 하는 미술관의 소명을 밝힌 기획이다.

전염병이 한창 유행하던 2020년에는 덕수궁 야외공간에서 진행된 ‘토끼 방향 오브젝트’의 기획에 참여하기도 했다. 윤율리와 장혜정이 큐레이터로 김성희가 해외 작가 커미셔너로 참여했으며 아트 플랜트 아시아와 서울시 중구청의 주최하에 진행된 대형 전시다. 국내 동시대 작가 19인·팀과 근현대 작가 11인·팀, 해외 작가 3인의 작품을 궁 일대에 걸쳐 선보였다. 평소 일반에 공개되지 않는 궁 내외부를 미술관처럼 활용해 아시아의 근현대 및 동시대 미술사를 관통하는 시각성을 함축적으로 제시하고자 했다.

‘토끼 방향 오브젝트’(2020) 전시전경. 양혜규의 작품. 타별, 윤율리 제공

윤율리가 기획의 글에서 밝히듯 “질병이 야기한 새로운 규범은 인간의 존재론적 준거를 그 부산물로 역전시킨다. … 무엇보다 미술가의 활동은 세계가 맞닥뜨린 각종 이상징후로부터 여러 존재의 양식에 발현한 차이를 섬세히 분별하는 것”이다. 전시는 덕수궁이라는 장소가 지닌 역사적 상징성 위에 2020년의 특수한 사회적 상황을 중첩시키는 한편, 그 복합적 시공 속 “가까운 미술에서 실현된 산만한 유행과 실험”을 펼쳐 놓음으로써 관객으로 하여금 미술의 방식으로 증언된 현재의 풍경을 거닐도록 했다.

‘토끼 방향 오브젝트’(2020) 전시전경. 김홍주의 작품. 타별, 윤율리 제공

◆모두의 발돋움을 위한 전시, 그 무대가 어제보다 견고하도록

“전시는 제도적인 장치이자 무대이기도 하고 … 작가, 작품, 기관, 큐레이터, 비평가, 미술 애호가와 미술시장 종사자까지 다양한 이해관계가 한데 모여 여러 작용을 일으키는 장이기도 합니다. 이런 제도적 참여자들이 ‘다음 단계’로 계속 이행할 수 있도록 성장시키는 것이 전시의 가장 큰 목적이라고 봅니다.”

전시를 만드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 묻자 위와 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작가를 포함하여 전시 제작에 뛰어든 모든 참여자들이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도록, 전시가 견고한 발돋움판으로서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윤율리에게 전시란 끝없이 연속적인 사건이다. 매번 과거보다 나은 현재의 전시를 만들기 위해 분투하는 일이다. 그래야만 그보다 더 나은 미래를 향하여 또 한 번의 발걸음을 내디딜 수 있을 것이므로.

쉼 없이 반복되는 전시의 여정 속에서, 그 시공을 기획하는 큐레이터는 “좋은 시너지를 낼 수 있는 동기를 서로 교환시키고, 한편 유무형의 자산 및 상징자본을 적절히 분배하는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해야 한다. 하나의 전시를 위해 결성된 공동체가 건강한 체계를 갖추고, 목표를 향해 순조롭게 나아가도록 감독하고 책임지는 것이 그의 업무다. 윤율리는 전시라는 무대 위에 스스로 올라서고자 하는 큐레이터십을 경계한다. 모두의 발돋움을 지탱할 지금의 무대가 더욱 견고하도록 거듭 계획하고, 정밀하게 구축하고, 세심하게 가다듬는 일에 오롯이 진심을 다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