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에선] 재판 지연의 불편한 진실

법원의 ‘재판 지연’ 문제가 날로 심각해지고 있다. 대법원이 21일 공개한 사법연감 통계에는 전국 법원의 사건 처리 기간이 해가 갈수록 증가하고 있는 것이 뚜렷한 수치로 나타났다. 이균용 대법원장 후보자 인사청문회에서도 “판사들의 소명의식이 떨어졌다”, “법관이 6시 땡 하면 퇴근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의원들의 질타가 쏟아졌다. 

 

법조계 안팎에선 그 원인에 대한 각종 분석이 나오고 있다. 일각에선 김명수 대법원장의 ‘고등부장 승진제 폐지’와 ‘법원장 후보추천제 도입’으로 인한 내부 경쟁 하락을 원인으로 꼽는다. 새 대법원장이 시스템을 되돌리면 개선이 가능하다고 믿는 사람들도 있다. 과연 그럴까? 30년 가까이 재판 실무와 사법행정을 겪은 A부장판사는 고개를 내저었다. “복잡한 문제에 대해 간단한 해결책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이해부족이거나 거짓말이죠.” 

장혜진 사회부 기자

그렇다면 사건 처리 지연의 원인은 무엇일까. 첫째, ‘판사 자원의 질적 저하 경향성’이다. 이는 현재의 판사들이 수준 이하라는 뜻이 아니라 과거와 대비한 전체적인 경향성을 얘기하는 것이다. 로스쿨과 법조일원화 도입에 따른 법조시스템 및 사회변화로 판사라는 직업에 대한 매력이 예전 같지 않다. 단편적 예로 학력고사 수석이 판검사를 하던 시절과 달리 이제 전국 수능 수석은 의대를 택한다.

 

둘째, 사회환경 변화로 인한 ‘절대적 근무시간’ 감소다. 사회 전반적으로 ‘워라밸’에 대한 관심이 커지며 소위 ‘돌격대 문화’는 소실됐다. 

 

셋째, 법관들의 육아휴직, 자녀돌봄휴가, 부분근무가 늘어났다. 이 역시 달라진 사회 분위기가 반영됐다. 그 영향으로 실제 재판업무에 투입되는 인원 수는 서류상의 판사 인원에 미치지 못한다. 무엇보다 이로 인해 사무분담의 불안정성이 과거보다 커졌다는 분석이 있다. 그 간접 효과로 육아휴직 등을 쓰지 않는 법관들이 업무량의 기준점을 스스로 낮추는 경향도 있다고 한다.

 

넷째, 고등부장제 폐지를 비롯해 언론에서 지적하는 동기부여 약화를 꼽을 수 있다. 다섯 번째, 사건이 복잡다단해지고 있다. 한 고참 재판장은 “과거보다 계약·권리 관계가 복잡해지고 등장인물도 많아졌다”며 “한 기일에 다툼 있는 사건 4건 보기도 벅차다”고 말했다.

 

여섯 번째, 연고를 이유로 한 재배당 기준이 너무 엄격하다. 법조일원화 시행으로 이제는 일정 기간 변호사로 근무해야만 판사로 임관할 수 있다. 그러나 법조윤리 강조로 과거 근무했던 로펌이나 친·인척이 근무하는 로펌 사건은 회피해야 한다. 이는 중요·복잡사건의 잦은 재배당 원인으로 꼽힌다. 

 

재판 지연 문제는 법원 내부뿐 아니라 우리 사회 전반의 변화와 밀접하게 맞닿아 있다. 고등부장 승진제를 되살려 판사들의 ‘고등부장 뽕’(승진 욕구)을 일깨우면 사건 적체가 해결될 것이라는 주장은 틀렸다. 불편한 진실이지만 재판 지연 문제를 한번에 해결할 묘책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나마 법관 및 직원 증원만이 한정된 범위 내에서 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 뿐이다. 복잡한 문제에 대한 단순한 해결책은 십중팔구 오답일 가능성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