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론 침묵이 악마,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대규모 학살에 침묵해선 안 돼”

러시아 출신 지휘 거장 세묜 비치코프, 푸틴 겨냥 비판 목소리
127년 전 창단해 ‘체코 국민 작곡가’ 드보르자크가 첫 지휘한 체코 필하모닉 2018년부터 이끌어
피아니스트 조성진 등 한국인 음악가들 재능과 열정 극찬
1985년 베를린 필하모닉 데뷔 당시 카라얀과의 인연도 소개

“때로는 침묵이 악마일 때가 있어요. ‘예술과 정치는 서로 관여하지 않는다’는 오래된 규칙 같은 말이 있지만 이것은 정치가 아니라 전쟁입니다. 우크라이나에서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들은 대규모 학살입니다.”

 

다음 달 체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내한하는 러시아 출신 지휘자 세묜 비치코프(71)는 최근 세계일보와의 서면 인터뷰에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에 자신이 왜 분노의 목소리를 내는지 설명했다.

 

체코 필하모닉 상임지휘자 겸 음악감독 세묜 비치코프. 인아츠프로덕션 제공

지난해 초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자 체코 프라하 바츨라프 광장에서 우크라이나 지지 연설을 하고, 이후 유럽과 미국의 방송에 출연해 전쟁 반대 목소리를 높인 소신과 결기가 그대로 느껴졌다. 지난해 3월 대규모 인파가 모인 프라하에서 우크라이나를 위한 자선 음악회도 열었던 그는 “평생 정치에 관여하지 않고 살아왔지만 삶과 죽음, 인류의 실존에 대한 이야기라면 다르다”며 “나는 그저 인류애적 관점에서 인간답게 행동했을 뿐”이라고 강조했다. 

 

1952년 옛 소련에서 태어난 러시아계 유대인인 비치코프는 레닌그라드음악원에서 공부했다. 20세에 라흐마니노프 지휘 콩쿠르에서 우승하며 이름을 알린 그는 1975년 자유를 찾아 미국으로 갔다. 뉴욕 매네스음대 졸업과 동시에 같은 대학 관현악단 음악감독으로 취임할 만큼 실력을 인정받았다. 

 

이후 베를린 필하모닉과 1985년 첫 지휘를 한 후 꾸준히 호흡을 맞추고 있으며, BBC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명예 지휘자로서 BBC 프롬스 무대에 단골 지휘자로 오르고 여러 명문악단의 객원 지휘자로 활동하는 등 거장의 반열에 올랐다. 그는 베를린 필 종신 상임지휘자였던 카라얀(1908∼1989)과의 인연을 묻는 질문에 “1985년 2월에 카라얀이 나를 만나고 싶어한다는 연락을 받고 베를린으로 가서 그의 지휘 공연을 관람한 뒤 다음 날 카라얀의 영상 스튜디오로 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전했다. 이어 “나는 그간 도저히 해결할 수 없었던 수많은 (곡) 해석과 음악의 본질 등에 대해 끊임없이 물었고 카라얀은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기꺼이) 설명해줬다. 타고난 교육자였다”고 덧붙였다.  

 

비치코프는 2018년부터 체코 필하모닉의 상임지휘자 겸 음악감독을 맡고 있다. 127년 역사의 체코 필하모닉은 체코의 ‘국민 작곡가’ 안토닌 드보르자크(1841∼1904)가 1896년 창단 연주회를 지휘한 악단이다. 드보르자크는 당시 자신이 작곡한 ‘성서의 노래’를 초연했다.

 

비치코프는 악단에서 ‘대디(아버지)’로 불린다. 2017년 오랜 지휘자였던 벨로홀라베크가 타계한 뒤 슬픔에 잠겼던 체코 필하모닉 단원들은 비치코프가 객원 지휘를 맡았던 공연에 매우 감동했다. 공연이 끝나자 단원들이 우르르 몰려가 “우리의 아빠(Our Daddy)가 돼달라”고 요청한 일화는 유명하다. 

 

다음 달 24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하는 내한 공연은 악단으로선 여섯 번째이지만 비치코프에겐 처음이다. 그는 “한국 공연은 처음이지만 지난 4월 (체코 필하모닉 유럽 투어에서) 피아니스트 조성진과 너무나 감명 깊은 연주를 했다”며 “조성진은 정말 대단한 음악적 파트너이자 훌륭한 사람으로 그와 함께한 시간은 좋은 기억으로 남았다”고 했다. 이번 무대에서 체코 필하모닉은 드보르자크의 ‘사육제 서곡’과 ‘피아노 협주곡 g단조’, ‘교향곡 7번’을 들려준다. 비치코프는 피아노 협주곡 g단조와 관련, “피아노 협주곡은 정말 완벽한 걸작인데, 체코를 제외하고 다른 나라에선 이상할 정도로 자주 연주되지 않아 이해하기 어렵다”며 “브람스와 베토벤을 합친 듯하면서도 드보르자크의 음악적 특성을 지닌 곡이다. 물론 피아니스트에겐 어려운 작품”이라고 말했다. 

 

그는 “언제나 이번이 처음인 것처럼 새로운 마음가짐과 자세로 무대에 오른다”며 “모든 생각과 모든 순간은 그게 가장 마지막일 수도 있다. 그래서 뭘 하든간에 그 순간이 전부인 것 처럼, 마치 내일이 없는 것처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비치코프는 한국의 음악가들에 대해선 “지난 몇십 년 사이에 한국인 클래식 음악가가 폭발적으로 늘었다. 한국인 음악가가 없는 오케스트라는 찾을 수 없을 정도”라며 “이는 자라온 것과 다른 문화를 뼛속 깊이 받아들여야 할 수 있는 일이기에 대단히 놀랄 만한 일이다. 특별한 재능을 지닌 (한국인) 음악가들이 대단하다”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