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교를 부리지 않는 아름다움”…한국 석조문화재, 일본 박물관의 첫인사 [일본 속 우리문화재]

도쿄국박, 출입구 앞에 문석인, 석양 한국 유물 배치
네즈미술관, “내방객을 맞는 이정표”로 장명등 전시
일본 식 정원 꾸미는 장식물로도 다양하게 활용

국외소재문화재재단에 따르면 일본 소재 한국문화재는 9만5622점(올해 1월 1일 기준)이다. 소장처는 도쿄국립박물관 등 393곳에 이른다. 해외에 있는 한국문화재 전부가 22만9655점(27개국 784곳)이니 일본 비중이 41.64%다. 공식집계가 이렇고, 알려지지 않은 것까지 포함하면 일본의 비중은 더 높아질 것이라는 게 정설이다. 

 

일본 소재 한국문화재는 질적으로도 우수하다. 한국에서도 비슷한 사례를 찾을 수 없는 것이 적지 않다. 한국에 있는 비슷한 유물보다 뛰어난 것들도 많다. 

 

이런 이유로 웬만한 규모의 일본 박물관에서 한국 문화재를 만나는 건 어렵지도, 드물지도 않다. 가장 쉽고, 흔하게 볼 수 있는 한국 문화재가 전시관 주변, 정원 등에 세워둔 석물(石物)이다. 출입구 근처에 세워 관람객들과 첫인사를 나누는 전시물로 한국 석조문화재를 선택한 박물관도 있다.  

일본 도쿄국립박물관 출입구에서 동양관으로 이어지는 길 위에 세워진 문석인, 석양.

​일본 최대, 최고인 도쿄국립박물관을 찾은 관람객이 가장 먼저 만나는 전시물은 한국에서 가져온 문석인(文石人) , 석양(石羊)이다. 한국, 중국, 동남아시아 등 다른 나라 유물을 모아둔 동양관으로 이어지는 길 양쪽에 문석인 4점, 석양 2점이 자리잡고 있다. 문석인 안내판에 평양에서 온 것으로 전해지는 18~19세기 작품이라고 적혀 있다.

네즈미술관 출입구의 배모양 석물과 함께 서 있는 장명등(왼쪽)과 정원에 설치된 부도.

일본 최고 사립박물관으로 꼽히는 네즈미술관은 출입구에 배 모양의 일본 석물과 함께 장명등(長命燈·망자의 영혼을 위로하고 후손들의 장수와 복을 비는 의미로 무덤에 세운 석물)을 배치했다. 미술관은 “과거 네즈 가문의 광대한 저택에 놓여 있던 석선(石船)은 방문객들을 위한 이정표였다. 2009년 이 돌을 새로운 곳으로 옮겨 조선시대 장명등과 함께 내관객을 맞이한다”고 적었다.

 

​네즈미술관은 아름다운 일본식 정원으로 유명한 데 이 곳에 한국 석물이 여러 점이 배치되어 있다. 고려시대 부도(浮屠·승려의 사리나 유골을 안치한 석탑)가 뛰어난 예술성으로 특히 유명하다.

오구라슈코칸 정원에 나란히 배치되어 있는 석양, 문석인, 오층석탑.

1902년 개관한 오쿠라슈코칸은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사립박물관이다. 이 곳은 출입문 양쪽으로 한국, 중국 문화재를 배치했다. 왼쪽 편에 석양 1점, 문인석 2점, 이천오층석탑이 서 있다. 이천오층석탑은 대표적인 약탈문화재로 꼽힌다. 경기도 이천의 향교 근처에 있던 오층석탑의 유랑은 1915년 경복궁에서 열린 시정5년 조선물산공진회로 시작됐다. 일제는 조선 통치 5년의 성과를 알리겠다며 공진회를 개최했고, 전국에서 석탑 등을 마음대로 옮겨와 공진회장을 꾸몄다. 그 중 하나였던 오층석탑을 오쿠라슈코칸 설립자인 오쿠라 기하치로가 일본으로 빼돌렸다.

고토미술관 정원의 문석인(왼쪽)과 망주석.

​고토미술관 정원에도 문석인, 망주석, 장명등 등 우리나라 석물이 중국, 동남아시아에서 온 것으로 보이는 석물들과 함께 이곳 저곳에 서 있다. 네즈미술관 정원과 비교하면 관리가 제대로 안되고 있는 듯 보이고 그 속의 석물들도 단정한 모양새는 아니어서 씁쓸하다.

 

정원 꾸미는 걸 좋아하는 일본인들에게 한국 석물은 인기가 높았다. 일제강점기에는 선박이 운행할 때 중심을 낮추어 균형을 잡도록 선체 바닥을 석물로 채운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선박평형수 역할을 석물이 했던 것이다.

 

이 중엔 오쿠라슈코칸의 오층석탑처럼 불법으로 유출한 것이 적지 않다. 일본 소재 한국문화재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유출 형태다. 그래서 일본 박물관의 한국 석조문화재를 보면서 적잖이 당혹스러울 수 있다. 대부분이 묘지, 사찰 등에 있던 것을 자기네들 정원을 꾸미겠다고 가져가 놓고선 자랑하듯 내놓을 때 일말의 죄책감도 없는 건가 싶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모두가 약탈의 결과라고는 할 수 없다. 당시 성업 중이던 골동상 등을 통한 거래도 많았다.​

 

궁금한 것은 유출 형태가 약탈이든, 거래든 일본인들이 이렇게나 가져가 지금도 전시하고 있는 한국 석물의 매력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일본인들은 무엇에 반해 그토록 애호했을까. 

 

똑부러진 답을 찾기가 쉽지 않은 데 정귀문의 책 ‘일본 속 조선민예미’라는 책에 실마리로 삼아볼 만한 대목이 있어 눈길을 끈다. 정귀문은 일본 교토 고려미술관 설립자인 정조문의 형으로 1960~1970년대 일본 내 한국문화재를 발굴하고, 소개하는 활동을 적극적으로 펼친 인물이다.

 

그는 이 책에 실은 ‘석인(石人)의 풍경’이란 글에서 교토국립박물관, 도쿄국립박물관, 도쿄도 기온사(祈園寺) 등에서도 정원에 수십 기의 석인이 있는 걸 봤다면서 그것의 아름다움에 대한 나름의 견해를 서술했다.

 

“그 모든 것이 각각이 다른 환경과 융합하고 있다. 석인은 장소를 따지지 않는 모양이다. 어울리는 장소를 사람이 정한다기 보다는 놓여진 석인이 풍경이나 환경을 만들어내는 것 같다.”

 

“10기면 10기 모두 풍모가 달라 근엄한 체 하는 것이 있으면, 미소를 머금기도 하며 변화가 풍부하다.…(석인을 만든 장인은) 살아가는 것에 있어 기교부린 흔적이 없는 정신을 (석인의) 서 있는 모습에 깃들게 한 것이다.”

 

이런 설명은 일본인이 오랫동안 최고의 가치를 부여해 온 고려다완의 특징과도 일맥상통하는 듯 보인다. 일본인들은 특별히 멋부리지 않아 소박하고, 무심해 보이지만 그것에 내포된 조선의 아름다움에 감탄하고, 우리보다 먼저 큰 의미를 부여하기도 했다. 한국의 석물에서 보았던 아름다움도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