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충격’이란 수식어를 쓸 수도 없을 것 같다. 그냥 실력 차이다. 한 번 삐끗한 것은 실수라고 해도 두 번이나 똑같은 상대에게 두 세트를 따내고 내리 세 세트를 내주는 ‘리버스 스윕’을 당한다는 것은 실력에서 뒤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선수들을 적재적소에 활용하는 용병술이나 로테이션을 정하는 세자르 에르난데스 곤잘레스 감독의 전략, 전술도 딱히 눈에 띄지 않았다. 감독만 탓할게 아니다. 결정적인 상황마다 끝맺음하지 못하는 선수들은 기량은 물론이고 체력까지도 밀렸다. 이것이 한국 여자배구의 현주소다. 이제 한국 여자배구는 세계에서만 변방이 아니라 아시아에서도 변방에 밀려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자르 에르난데스 곤잘레스 감독이 이끄는 여자배구 대표팀은 지난 1일 중국 항저우 사범대학 창첸캠퍼스 체육관에서 열린 2022 항저우 아시안게임 배구 여자부 C조 예선 첫 경기에서 베트남에 세트 스코어 2-3(25-16 25-22 22-25 22-25 11-15)으로 패했다.
첫 두 세트를 먼저 따냈지만, 3,4,5세트를 내리 내주며 대역전패를 당했다. 4세트에는 15-12로 앞서던 상황에서 내리 6점을 내주며 세트를 내주기도 했다. 5세트에도 11-11로 맞선 세트 막판 한 점도 내지 못하고, 내리 네 점을 내줬다.
강소휘(32점·GS칼텍스)와 박정아(18점·페퍼저축은행)가 분전했지만, 베트남의 트란 띠 딴 뚜이(24점), 트란 띠 비치 뚜이(17점)의 화력도 못지 않았다. 블로킹 득점에선 10-10으로 대등했고, 수비 집중력은 베트남이 한 수 위였다.
이날 경기 전만 해도 모든 상황이 우리에게 유리했다. 베트남은 전날(9월30일 오후 2시30분) 열린 네팔과의 조별예선 경기를 치르고 우리와 맞붙었다. 네팔을 1시간도 되지 않는 56분 만에 꺾어 체력적인 소모가 거의 없었다고 해도 이날 경기가 11시30분에 치러졌기에 24시간도 되지 않아 한국과 맞붙는 일정은 부담이 됐을 게 분명했다.
그러나 베트남은 강했다. 지난 8월30일 2023 아시아배구선수권대회에서 한국이 조별예선에서 베트남에 2-3으로 패했을 때만 해도 ‘충격패’라는 단어를 쓸 법 했다. 당시 한국의 세계랭킹은 35위였고, 베트남은 47위였다. 아무리 2022, 2023 발리볼네이션스리그(VNL)에서 2년간 24전 24패를 당한 한국이지만, 아시아 무대에서만큼은 중국이나 일본, 태국 정도만 한국과 대등 혹은 우위에 있는 팀이라고만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날 경기로 알았다. 이제 베트남에 진다고 해서 ‘충격패’라는 단어를 쓰면 안된다. 이제 베트남도 우리보다는 여자배구에서만큼은 우위에 있는 팀이다. 실제로 세계랭킹이 이날 경기 전 한국은 40위, 베트남은 39위였다. 상대가 전날 경기를 치른 뒤 24시간도 지나지 않아 맞붙었는데도 풀세트 접전을 이겨냈다. 모든 스포츠의 기본인 체력에서도 우리보다는 한참이나 월등했다는 얘기다. 세계랭킹은 단 한계단 차이지만, 실질적인 차이는 더 크다고 해도 할 말이 없는 수준이다.
베트남에 당한 패배는 단순한 1패가 아니다. 4강행이 사실상 어려워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2일 아마추어 수준인 네팔에게 승리해 C조 2위로 8강에 진출하게 되면 중국과 북한, 인도가 속한 A조에서 상위 1,2위팀과 8강 라운드 E조에 묶여 4강 진출을 놓고 다투게 된다. 이미 베트남에 당한 1패를 안고 8강에 올라가기에 북한을 잡는다고 해도 한 수 위 전력인 중국에 패하게 되면 1승2패로 4강 진출에 실패한다는 얘기다. 매우 암울한 상황이다.
세자르 감독은 베트남전 패배 후 자신의 실책을 인정했다. 이.제.서.야. 말이다. 그는 “우리가 초반에는 경기를 잘 풀어나가다가, 어느 시점부터 공격 성공률이 떨어졌다. 그때 내가 현명한 선택을 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어 “이제 성과가 필요하다는 팬들의 생각에 나도 동의한다. 승리하지 못해 아쉽기도 하다. 중국, 북한 등과 벌일 8강 라운드가 힘겹긴 하겠지만,4강 진출 가능성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당장 내일 네팔전부터 잘 준비하겠다”고 덧붙였다.
지난 2023 VNL에서 거듭된 패배에다 “나의 겸직을 놓고 불만을 가져야 하는 것은 한국 여자배구 대표팀이 아닌 클럽팀”이라는 망언에 가까운 인터뷰를 내놓아 세자르 감독에 대한 경질 여론이 높아졌을 때도 일부 여자배구 팬들은 ‘국내 감독보다는 외국인 감독이 낫다’며 절대적으로 옹호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VNL 이후 아시아선수권과 2024 파리올림픽 세계예선전, 그리고 항저우 아시안게임 조별예선 첫 경기를 보고도 옹호할 수 있는지가 궁금하다. 냉정히 말해 세자르 감독 아래서 여자배구 대표팀의 실력은 김연경 등의 베테랑 주축 선수들의 은퇴를 감안하더라도 훨씬 퇴보했다.
2021년 10월 부임 후 세자르 감독의 여자배구 대표팀은 1패를 추가해 통산 5승39패를 기록하고 있다. 거듭된 패배마다 “우리의 배구를 하는 게 중요하다”, “과정이 중요하다”던 세자르 감독은 지금의 상황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지 궁금하다. 분명한 건, 세자르 감독의 한국 여자배구 대표팀은 그토록 부르짖던 과정도 큰 의미가 없게 됐다. 결과가 이렇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