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계 “소득 공백 해소” vs 경영계 “임금구조 개편부터”… 정년연장 ‘딜레마’ [심층기획]

총선 앞두고 주요 의제 부상

연금 수급까지 ‘노후소득’ 사각 불가피
한국노총 ‘은퇴 늦춤’ 청원 5만명 달성
정부, 개편 인식 같지만 방향성은 달라
정년연장보다 현 제도 개편에 무게

경총, 기업 부담에 청년고용 부정 전망
300인 미만 기업 79%는 정년제도 전무
직종 간 근속기간 커 양극화 유발 지적
“사회적 대화 통한 노사정 대타협 필요”

“국민연금 수급 연령까지 정년을 연장해 소득 공백기를 메워야 한다.”(노동계)

 

“연공성 높은 임금구조 개편이 선결돼야 정년연장의 부작용을 줄일 수 있다.”(경영계) 현행 60세인 정년을 개편하는 논의가 총선을 앞둔 노동시장의 주요 의제로 급부상하고 있다. 일하는 노인이 늘어나는 현실을 반영해 정년 연장을 외치는 노동계의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지만, 기존의 정년제도가 여전히 시장에 안착하지 못한 상황에서 자칫 노동시장의 이중구조만 고착화시킬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정년 개편이 노동시장에 미치는 파급력과 저출산·고령화 정책과의 충돌 가능성 등 논의 과정에서 정부의 셈법도 복잡해질 것으로 보인다. 정년 개편이 노사정과 세대 간 의견차가 뚜렷한 사안인 만큼 사회적 대화를 통한 대타협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늘어나는 ‘일하는 노인’

 

현행 60세인 정년은 2013년 법제화를 거쳐 2016년부터 단계적으로 시행됐다. 제도 시행 7년여 만에 개편을 추진하자는 목소리가 나오는 것은 노동시장에서 일하는 노인의 수가 급격히 늘고 있어서다.

 

3일 고용노동부의 ‘노동시장 동향’에 따르면 지난 8월 60대 이상 고용보험 신규 가입자는 21만4000명으로 전연령대에서 가장 높았다. 정년 이후에도 일하는 노인이 단순 증가하는 것을 넘어 노동시장의 주류가 되고 있는 것이다. 반면 청년들의 노동시장 진입은 꾸준히 감소하고 있다.

 

통계청 ‘고용동향’에서 지난 8월 60세 이상 취업자는 전년 대비 30만4000명 늘었는데, 15∼29세 청년 취업자는 10만3000명이 감소하며 10개월째 내림세를 보였다. 내년이면 65세 이상 노인 인구가 사상 처음 1000만명을 넘어설 것으로 전망되는 가운데 이 같은 흐름은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기존의 정년 제도를 개편해야 한다는 인식은 정부와 노동계가 모두 갖고 있다. 정부는 지난 7월 경제사회노동위원회(경사노위)를 통해 ‘초고령사회 계속고용 연구회’를 발족하고 정년 개편 논의에 착수했다. 노동계에서는 한국노동조합총연맹(한국노총)이 지난 8월 정년 연장을 촉구하는 국민동의청원을 제기해 국회 상임위원회 부의 기준인 5만명을 달성했다.

노정이 개편 논의에 속도를 내고 있지만 그 방향성에서는 차이를 보인다. 먼저 노동계는 기존의 정년을 65세까지 단계적으로 연장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60세인 정년과 국민연금 수급 연령인 65세 사이의 소득 공백기를 메우기 위해서는 정년을 연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연금개혁을 추진 중인 정부가 연금 수급 연령을 68세로 상향하는 방안을 논의하면서 정년 연장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더 커질 것으로 보인다.

 

김성희 고려대 노동대학원 교수는 “현재 노동시장에서 고령기의 소득 공백을 메울 수 있는 해법은 정년연장밖에 없다”며 “한국노총이 제시한 안은 정년을 단계적으로 늦추자는 것으로 조정 가능성이 열려 있다”고 평가했다.

 

반면 정부는 정년제도의 실효성을 지적하며 계속고용 형태의 개편에 무게를 두고 있다. 기존의 정년제도가 시장에서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는 만큼 노동계의 주장대로 연장하거나 또는 폐지, 재고용하는 형태로 유연화하겠다는 것이다.

 

실제 통계청의 ‘경제활동인구 조사 고령층 부가 조사 결과’를 보면 지난 5월 기준 주된 일자리에서 떠나는 평균 연령은 49.4세로 분석됐다. 60세 이후 일하는 노인이 늘고 있지만, 그들 중 상당수는 정년보다 한참 이른 시기에 퇴직하고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나선 것이다. 정부는 정년연장이 고령층의 안정적인 일자리 창출로 이어지지 못하는 상황에서 청년고용과의 충돌 가능성까지 감내하며 연장하는 것에 신중한 분위기다. 더 나아가 청년고용이 위축될 수 있다는 정책적 신호가 저출산에 영향을 끼치고, 그것이 고령화를 가속화시킬 수 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하는 상황이다.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는 최근 펴낸 ‘정년 60세 법제화 10년, 노동시장의 과제’ 보고서에서 연공성이 높은 임금체계에서 정년을 연장할 경우 기업에 부담이 되는 것은 물론 청년고용에도 부정적이라는 전망을 내놨다. 정년연장의 수혜자가 1명 늘어날 때마다 정규직 채용인원이 2명 감소하고, 매년 1만~1만2000명의 청년 일자리가 잠식될 것이란 추론도 덧붙였다.

 

정년연장이 청년고용에 미치는 영향을 두고는 전문가마다 의견이 엇갈리지만 구직 수요가 몰리는 직종에서는 정년연장에 따른 세대 간 충돌 가능성을 내다보는 의견이 적지 않다.

 

김종진 일하는시민연구소 소장은 “기업 입장에선 정년연장이 인건비 증가로 이어지기 때문에 청년고용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며 “이 부분에선 기업이 정년을 연장하면서 임금 부담을 줄일 수 있도록 장치를 두거나, 정부가 고용유지장려금을 확대하는 방안 등을 놓고 노사정이 논의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정년도 ‘양극화’ 심각

 

기존의 정년제도가 시장에 안착하지 못한 주된 이유로는 대기업과 중소기업, 유노조 기업과 무노조 기업,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의 양극화가 주된 원인으로 꼽힌다.

 

노동계에서는 양대노총을 중심으로 정년을 연장해야 한다는 입장이지만, 국내 300인 미만 기업의 79%는 정년제도가 없는 실정이다. 반면 300인 이상 기업에서는 93.8%가 정년제를 시행하고 있다. 사실상 대기업이나 공공부문, 노조가 있는 사업장에서 정년제가 집중적으로 시행되고 있고, 나머지 사업장에선 정년은커녕 상당히 이른 시기에 일터를 떠나면서 통계상의 평균 퇴직 시기가 49.4세로 내려앉은 셈이다.

 

직종 간의 격차도 상당히 벌어져 있다. 통계청 조사에서 가장 오래 근무한 일자리에서의 평균 근속기간은 15년7.9개월로 집계됐는데, 서비스·판매종사자(12년6.2개월)나 단순노무종사자(9년2.1개월)는 그 기간이 짧아 평균에 미치지 못했다. 반면 농림어업숙련종사자(27년2.8개월), 관리자·전문가(19년10.5개월), 사무종사자(16년11.9개월)의 근속기간은 평균을 웃돌았다. 향후 정년 개편 과정에서 양대노총뿐만 아니라 무노조 기업이나 중소기업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하는 이유다.

 

결국 충분한 논의를 통해 사회적 합의 모델을 구축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경사노위를 통한 사회적 대화는 중단된 상태다. 정부와 노동계가 저마다의 목소리만 높일 뿐 타협을 위한 방안을 제시하지 못한 상황에서 성급한 개편은 자칫 양극화를 부추길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김 소장은 “정년 개편은 노사정 간의 대타협이 필요한 사안”이라며 “서로가 일방적 주장만 펼칠 것이 아닌, 정년연장이나 청년고용에 따른 부담을 분담하는 형태의 빅딜이 성사돼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