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이어 이번 중동발 지정학적 위험 증대로 국제유가 급등 등 세계 경제 및 국제금융시장 불확실성이 한층 높아질 우려가 있어 이에 대해 경계심을 가지고 지켜봐야 할 필요가 있다.”
9일 국제금융센터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이슬람 무장정파 하마스 간 무력 충돌에 대해 “어떻게 전개될지 매우 유동적인 상황”이라면서 이같이 분석했다. 이·하마스 충돌은 ‘불확실성’을 싫어하는 금융시장 특성상 악재일 수밖에 없다. 관건은 이번 사태가 장기화하느냐다. 중동정세 불안정성 확대로 인한 고(高)유가 장기화는 정부의 국내 경제 ‘상저하고’(상반기 부진, 하반기 반등) 전망을 더 불투명하게 할 수 있다.
◆진정 국면이던 유가, 충돌에 ↑
이·하마스 충돌사태는 일단 세계 경제에 국제유가 상승이라는 충격을 줬다.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9일(한국시간) 오후 2시20분 기준 뉴욕상업거래소에서 서부 텍사스산 원유(WTI) 선물은 전 거래일보다 4% 상승한 배럴당 86.08달러에 거래됐다. WTI 가격은 최근 일주일 사이에만 9% 가까이 내리며 급속히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지만 요동치는 중동 정세가 순식간에 분위기를 바꿨다.
유가는 글로벌 인플레이션 변동에 큰 영향을 끼치는 지표다. 다만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모두 산유국은 아니라는 점에서 단기간 분쟁일 경우 유가 상승압력은 더뎌질 수 있다. 관건은 장기화 여부다. 이·하마스 사태가 장기화하거나 이란·사우디아라비아와 같은 산유국들이 분쟁에 개입할 경우 유가를 자극, ‘100달러’ 선을 다시 위협할 수도 있다. 국제금융센터는 “사우디와 러시아의 감산으로 글로벌 원유수급이 타이트하고 미국 전략 비축유가 40년래 최저 수준인 상황에서 중동발 공급충격이 가세하면 최근의 국제유가 강세 기조가 더욱 강화될 소지가 있다”고 분석했다.
이번 충돌이 유대교 명절을 틈탄 아랍 측의 기습 공격으로 시작됐다는 점에서 1973년 발발한 제4차 중동전쟁(욤 키푸르 전쟁)과 닮았다는 분석도 나왔다. 욤 키푸르 전쟁이 제1차 오일쇼크를 불러왔듯이 이번 사태가 유가 급등으로 이어지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있다. 삼성·LG·현대차 등 이스라엘 현지에 진출한 국내 기업들은 사태를 주시하며 대응에 나섰다.
◆“세계 경제 부담”…‘상저하고’ 불투명
시장 불안 심리로 자금은 급속히 안전자산으로 이동하는 중이다. 이날 금 현물 가격은 온스(1온스=31.1g)당 전 거래일 대비 19.67달러(1.07%) 오른 1852.68달러에 마감했다. 안전자산 선호심리 강화는 국내 금융시장에서 주가 하락, 원·달러 환율 상승으로 이어질 공산이 크다.
전문가들은 경제 악화 가속화를 우려했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그렇지 않아도 에너지 가격 상승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세계 경제가 매우 큰 부담을 안게 될 가능성이 있다”고 진단했다. 19일 기준금리 결정을 앞둔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에는 변수가 더 생긴 셈이다. 강성진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는 “국내 경기가 워낙 안 좋으니까 (한은이 기준금리 인상을) 실행에 옮기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사태가 장기화하면 정부가 고수해온 ‘상저하고’ 전망 달성 가능성은 더 어려워진다. 고물가로 인한 내수 부진에 역대급 세수 감소, 한·미 기준금리 격차로 재정·통화정책의 움직임도 쉽지 않다. 수출 회복 동력으로 꼽혔던 중국 경제는 부동산 디폴트 위기를 거치며 중장기적인 위험 요인이 됐다. 그나마 한국의 주력 수출 품목인 반도체 생산이 회복을 시작한 것이 희망적이다. 8월 반도체 생산은 13.4% 늘었고, 9월 반도체 수출은 올해 최저 수준의 감소율(-13.6%)을 기록했다.
정부는 파장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최상목 대통령실 경제수석은 용산 대통령실 브리핑에서 “사태 전개 방향이 매우 불확실하므로 정부는 각별한 경계심을 가지고 시장모니터링을 한층 강화하는 한편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우리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하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고 덧붙였다. 기획재정부는 오후 한국은행, 금융위원회, 금융감독원 등 관계기관 1급이 참석하는 관계기관 합동 시장상황점검회의(콘퍼런스 콜 형식)를 개최하여 금융·외환시장 영향을 긴급 점검했다.
이·하마스 충돌로 중동 지역 정세가 혼돈 속으로 빠져들고 있는 가운데, ‘2030 세계박람회’ 개최지를 두고 한국과 경쟁하는 사우디의 행보도 주목할 요소다. 사우디가 이번 무력 충돌에 어떤 입장을 밝히느냐에 따라 11월 예정된 개최지 선정에 변수로 작용할 수 있다.
◆각국 “긴장 고조행위 멈춰야”… 獨 “팔 원조 중단”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이슬람 무장정파 하마스 간 무력 충돌을 자행한 하마스를 규탄하는 목소리가 국제사회에서 커지고 있다. 앞서 양측의 대화를 추진하며 ‘중동 평화 중재자’를 자처하던 중국은 당혹감을 감춘 채 상황을 주시했다.
AP통신 등에 따르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 15개 이사국은 8일(현지시간) 비공개 긴급회의를 진행해 하마스가 저지른 공격을 규탄했다.
독일 정부는 하마스의 기습공격 이후 팔레스타인에 지원했던 원조를 중단하겠다고 이날 밝혔다.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는 “독일은 확고하고 변함없는 이스라엘 편”이라며 “이스라엘의 안전은 독일의 국가적 문제에 해당하고, 그에 따른 대응에 나설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나치 집권 시절인 2차세계대전 때 홀로코스트(유대인 학살)에 대한 독일의 책임과 관련된 발언으로 풀이된다.
마오닝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9일 정례 브리핑에서 “중국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모두의 친구로, 양측이 평화롭게 공존하고 안전과 발전을 공유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중국 관영 글로벌타임스는 사설을 통해 “미국과 일부 서방 국가가 어느 한쪽 편을 드는 성급한 결정은 불난 집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되기 쉽다”고 주장했다.
중국을 방문 중인 미국 민주당 척 슈머 상원 원내대표는 이날 왕이 중국 중앙정치국 위원 겸 외교부장을 만난 자리에서 “당신과 중국 국민들이 이스라엘 국민들과 함께 비겁하고 악랄한 공격을 규탄할 것을 촉구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하마스를 규탄하는 대신 양측의 자제를 촉구한 중국 외교부의 성명에 실망했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軍 “레바논 주둔 동명부대, 분쟁지와 떨어져 영향 없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이슬람 무장정파 하마스 간 무력충돌이 격화하는 가운데 유엔 평화유지활동(PKO)을 위해 레바논에 주둔하는 우리 군 동명부대의 안위에 이목이 쏠린다. 동명부대는 국경을 접한 레바논과 이스라엘 간 분쟁을 막는 것이 핵심 목표인데, 하마스의 이스라엘 기습과 때를 같이해 레바논 내 반(反)이스라엘 무장단체 ‘헤즈볼라’도 이스라엘 공격에 나섰기 때문이다.
국방부 관계자는 9일 “동명부대 주둔지는 분쟁 지역과 거리가 멀어 (이스라엘·하마스 충돌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며 “따로 대응을 하는 것은 없다”고 말했다.
외교부에 따르면 이스라엘에 장기 체류 중인 우리 국민은 예루살렘 약 290명, 텔아비브 등 약 210명 등 총 580명가량이다. 현재까지 우리 교민 및 여행객 피해는 접수되지 않았다. 외교부는 “신규 입국을 자제하고 가능한 한 체류 중 국민도 제3국으로 출국하기를 권하고 있다”며 “신변 안전에 각별히 유의해줄 것을 당부한다”고 밝혔다. 여행경보의 경우 가자지구 4단계, 서안 지역 및 가자지구 인근 5㎞ 내는 3단계로 유지하고, 기존 2단계(여행자제)이던 여타 지역은 2.5단계(특별여행주의보)로 격상했다.
대한항공은 이번 무력 충돌 여파로 이번주 운항 예정인 인천발 이스라엘 텔아비브행 항공편(KE957) 3편을 모두 결항하기로 했다. 한국인 체류객을 태울 텔아비브발 인천행 귀국편(KE958)은 현지 시간 기준으로 10일 오후 1시45분쯤 현지를 출발해 11일 오전 6시10분쯤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한다. 오는 11일과 13일 항공편은 외교당국 등과 협의를 통해 운항 여부를 결정할 예정이다.
텔아비브에 판매지점을 두고 있는 LG전자는 이스라엘에 파견된 임직원과 가족들을 한국으로 송환하기로 결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