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두 고려미술관 이사장 “재일교포, 뿌리 찾아가는 여행 필요… 韓 전통문화 알릴 것” [세계초대석]

부친 故 정조문 선생 수집한 문화재
1988년 1700여 점 바탕으로 문 열어
조선통신사행렬도 등 다수 작품 소장

미술관 이사·평의원 다수 일본인 학자
일본인 참여해야 식민사관 극복 생각
연구소도 운영… 고문서 등 보관·연구

日 유일 韓 문화재 전문 미술관 자부심
‘일본 속 조선문화’ 잡지도 발행 이목
정치·외교 초월한 문화 교류도 기대

‘일본 유일의 조선반도(한반도의 일본식 명칭) 문화재 전문 미술관.’

고려미술관으로 이어지는 골목길 초입에 세워진 작은 알림판에 적힌 이런 문구에서 이 미술관이 가진 큰 자부심과 사명감을 느낄 수 있다.



“일본에는 중국이나 세계 각지의 문화를 전하는 국공립 박물관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한반도 문화를 언제라도 즐기고 공부할 수 있는 시설은 없습니다. 한반도에 뿌리를 둔 (일본에 사는) 수백만명의 사람들에겐 뿌리를 찾아가는 여행이 필요합니다. 한류(韓流·한국 대중문화가 외국에서 유행하는 현상)만으로는 전달할 수 없습니다.”

정희두 고려미술관 이사장이 지난 6일 일본 교토시 고려미술관에서 가진 세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일본 내 한국 문화재 현황, 양국 간 문화 교류 등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정희두 고려미술관 이사장이 밝힌 미술관의 존재 이유다. 정 이사장의 부친인 고(故) 정조문(1918∼1989) 선생이 생전에 수집한 문화재 1700여점을 바탕으로 1988년 문을 연 곳이다. 문화재 수집에는 “진짜 미술품을 통해 우리 민족의 우수성을 전하겠다”는 의지가 작용했다.

미술관을 연 이듬해 부친이 세상을 떠나고 운영을 맡게 된 정 이사장은 매년 3∼4차례의 전시회를 열어 일본의 천년고도 교토에서 한국의 전통문화를 알리고 있다. 지금은 도자기, 회화, 가구 등에 그려진 무늬의 의미를 보여주는 ‘길상문양과 초충(草蟲)’ 전시회를 진행 중이다. 지난 6일 교토시 기타구 미술관에서 정 이사장을 만났다.

-진행 중인 전시회를 소개해 달라.

“설립 35주년을 기념하는 전시회다. 한반도 공예품의 시대별 길상문양을 통해 우리 민족이 애호한 문양에 담긴 ‘수복’(壽福·오래 살고 복을 누림), ‘쌍희’(雙喜·경사가 잇달아 일어남)의 바람을 전달하려고 했다. 일본에 ‘칠복신’(七福神·일본 민간에서 숭배하는 복신)이 있는 것처럼 우리는 봉황, 용, 거북이, 소나무 등을 함께 그려 건강, 장수, 자손번영 등을 기원했다. 한국과 일본의 벽사(辟邪·재앙을 물리침) 풍습에서 공통점을 찾다 보면 그 안에 담긴 문화 교류의 증거를 찾을 수 있다.”

-꼭 알리고 싶은 전시품이 있다면.

“‘치성광여래강림도(熾盛光如來降臨圖)’는 문정왕후(조선 11대 임금 중종의 비)가 세상을 떠난 후 제작한 불화(佛畵) 400점 중 하나다. 당시의 우주관을 보여주는 귀한 작품이다. 1569년에 제작되었다는 화기(畵記·그림 기록)가 있어 다른 불화의 제작연도를 추정할 수 있는 기준작으로 중요한 가치를 가진다. (한국) 리움미술관에서 올해 4월 열린 ‘조선의 백자, 군자지향’ 전에 빌려줬던 백자도 전시 중이다.”

-미술관 소장품은 어떤 것들인가.

“회화부터 도자기, 목공예품까지 다양하다. 1979년에 입수한 조선통신사행렬도 두루마기는 전부 펼치면 110m에 이르는 대작이다. 201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조선통신사기록물’에 속하는 유물이다. 1711년 일본을 찾은 통신사 행렬을 그린 것인데, 당시 쓰시마 번주(藩主)가 에도 쇼군에게 보고하기 위해 제작한 것이다. 통신사는 (전근대 시기) 일본과 한반도의 선린우호를 실현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관련 자료 20점 정도를 소장하고 있다.”

-잡지 ‘일본 속 조선문화’도 발행해 주목을 받았다.

“1969년부터 1982년까지 50호를 발행했다. (잡지 발행을 위해) 유적지 답사를 30번 실시했고 심포지엄, 관련 간담회를 열었다. 일본 각지에 남아 있는 도래인(渡來人·5∼6세기 일본으로 건너간 한반도 사람들) 유적이 일본 문화의 기초라는 걸 증명해 (일본의 왜곡된) 조선사관을 수정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그의 아버지 정조문은 ‘일본 속 조선문화’가 역사학, 민속학, 언어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한·일 학자가 교류하는 장이 되길 바랐고, 외부의 입김으로 이런 취지가 퇴색될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해 광고도 싣지 않게 하고 관련 경비 모두를 부담했다. 창간호는 100여부밖에 내지 않았으나 2호부터 2000부를 찍었고, 이후엔 5000부로 늘릴 정도로 큰 관심을 모았다.

교토신문은 “편견에 차 있던 일본 고대사에 이 정도의 충격을 준 잡지는 없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미술관을 이야기할 때도 정조문은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다. 경북 예천에서 태어나 8살 때인 1925년 부모를 따라 일본으로 건너온 그는 파친코 사업 등을 통해 이룬 경제력을 바탕으로 한국 문화재 수집에 나섰다. 1955년 교토의 골동품점 ‘야나기’에서 본 조선백자에 홀리듯 매료된 것이 시작이었고 미술관 설립으로 이어졌다.

정조문은 ‘언어, 사상, 이념을 넘어 조선이나 한국의 풍토 속에서 성숙한 아름다움’을 일본과 후대에 전하고 싶어했고, 이런 유지는 아들 정 이사장을 통해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정 이사장은 “아버지는 일본 사회에 동화되어 버리는 걸 겨우 막아가며 살아가는 재일동포들의 모습과 많은 한반도 우리 문화재가 일본인들의 수중에서 묻혀가는 모습을 보고 참을 수 없었다. 일본에서 어떻게 살아갈지를 고민하던 차에 조선백자를 만났고 수집을 결심하게 됐다”고 전했다.

-함께 운영 중인 고려미술연구소는 어떤 곳인가

“고문서, 전적(典籍·서적)을 보관, 연구하고 있다. 일본에 있는 한국, 조선 관련 문헌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교토를 중심으로 지금까지 142번의 공개강좌, 심포지엄을 열었다.”

-일본인들이 이런 활동에 적극 참여한 게 눈길을 끈다.

“일본인들이 참여해야 식민사관을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일본인들 스스로 잘못된 역사를 고치게 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일본 국민작가로 꼽히는) 시바 료타로가 큰아버지(정조문의 형인 소설가 정귀문)와 이웃이었는데 참여를 요청하자 우에다 마사키 교토대 교수가 함께하면 수락하겠다고 했다. 우에다 교수 중심으로 교토대 학자들이 모이면 자신도 참여하겠다는 조건이었다. 이런 요구들이 성사되면서 일본 지식인들의 참여가 활발해졌다. 도래인의 역사를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지금은 어떤가.

“미술관 이사, 평의원 대부분이 일본인 학자다. 미술관을 열 때 일본인들의 힘이 필요했고, 지금까지 운영할 수 있었던 것도 이들의 지지가 큰 힘이 됐다. 미술관 운영은 금전적인 것만으로 가능하지 않다. 또 일본인 스스로의 목소리로 한국 문화의 우수성을 말하게 해야 전반적인 문화의 흐름을 바꿀 수 있다.”

-미술관 운영이 쉽지는 않았을 것 같다.

“아버지는 ‘20년만 버텨라. 20년 뒤면 조국이 통일될 테니 통일정부에 운영을 맡기면 된다. 너희가 먹고살 수 없게 되더라도 미술관만은 지켜라’라는 엄한 유언을 남겼다. 35년간 운영해 온 게 기적처럼 느껴진다. 유지관리비, 인건비, 전시 등에다 유물 보수비가 막대하다. 2000년대 들어서는 북한의 일본인 납치문제, 한국인을 대상으로 한 헤이트스피치(혐오발언), 독도 갈등 등으로 상황이 더 어려워졌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사태로 사람들의 이동이 어려웠던 지난 3년간은 미술관 존재 자체가 필요 없는 건 아닌가 하는 고민도 했다. 그래도 ‘미술관 문을 닫는 일은 죽어도 하지 않는다’는 결심을 하고 있다.”

-한국에서 도움을 받고 있나.

“국외소재문화재재단에서 문화재 보수비용을 지원받았다. 지난 1월에는 최응천 문화재청장이 방문해 미술관이 필요로 하는 것을 듣고 갔다. ‘한국을 믿어 달라’는 말을 듣고 든든했다.”

-개선된 한·일관계를 문화재 교류로 이어갈 방법이 없을까.

“일본에 있는 한국 문화재라고 하면 모두 약탈당한 것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는데 그렇지 않다는 걸 한국에 알려야 한다. 한국 문화재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일본 고미술 애호가들의 안목과 수집 이야기를 통해 마음의 교류를 해보는 건 어떨까. 일본에 고려미술관이 있는 것처럼 한국에도 ‘일본미술관’이 필요하다.”

한·일관계는 유독 부침이 많다. 어느 나라보다 가까웠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싸늘하게 식기도 한다. 지난 몇 년간이 그랬다. 그 속에서 정 이사장이 말한 양국 간 ‘마음의 교류’도 풍파를 겪었다. 그는 정치, 외교를 초월한 이어질 수 있는 문화 교류를 꿈꾼다.

“문화란 누군가 으스대며 말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흘러갑니다. 문화 교류가 사람과 재화의 흐름을 낳고, 그렇게 역사가 움직입니다.” 결코 쉽지 않은 여건임에도 35년째 미술관을 지킨 정 이사장의 통찰이다.

 

정희두 고려미술관 이사장은…

 

●1959년 교토 출생 ●1983년 나라대 문학부 사학과(일본고대사 전공) 졸업 ●1988년 고려미술관 상무이사 ●2016년 고려미술관 학예부장 ●2019년 대표이사 ●저서 ‘공생과 민제(民際)의 역사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