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릴레이 책 ‘대화’에 등장하는 정리 - 칭찬 - 공격 - 칭찬順 대화 인정·주장으로 조화롭게 토론 공격일변도 정치토론도 적용을
1632년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대화: 천동설과 지동설, 두 체계에 대하여’라는 책을 출판했다. 실험 과학자 갈릴레이는 아리스토텔레스학파와 가톨릭 교회 성직자들을 반대편에 두고 세계관의 대결을 벌이고 있었는데 이 책은 그 대결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책 ‘대화’에는 살비아티, 심플리치오, 사그레도라는 세 사람이 등장한다. 살비아티는 지동설주의자다. 그는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이 자신을 상징한다. 심플리치오는 천동설주의자다. 당연히 아리스토텔레스는 아니다. 그의 추종자일 뿐이다. 시대도 다를뿐더러 당시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직접 비판하면 ‘나쁜 놈’이라는 비난을 피할 수 없는 시대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그레도는 둘 사이에서 공정한 사회를 보는 사회자다.
토론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람은 사회자다. 우리는 토론 사회자라고 하면 대통령 선거 토론회 사회자를 먼저 떠올린다. 이때 사회자의 역할은 시간 배분에 그친다. “A후보 5분 말씀하셨으니 이제 그만하시고 B후보 말씀하십시오.” 그런데 사회자의 진짜 역할은 시간 배분이 아니다. 토론할 때 장황한 사람이 있고 간단히 말하는 사람이 있는 법인데 그걸 시간으로 나누는 게 무슨 대단한 일이겠는가.
사회자의 진짜 역할은 정리다. A가 뭔가 장황하게 설명했다. 청중도 못 알아듣고 B도 못 알아듣는다면 토론이 이어질 수 없다. 이때 사회자가 “A님의 주장은 이러저러해서 이러저러한 것입니다”라고 정리해 주고 “여기에 대해서 B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고 토론을 이어 가게 만들어 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대화’에서 반복되는 토론의 틀은 의외로 단순하다. 심플리치오가 아리스토텔레스를 비롯한 천동설주의자들의 이론을 장황하게 설명한다. 천동설 이론이 장황한 이유는 간단하다. 사실이 아닌 것을 설명하려니 장황할 수밖에 없다. 이때 사회자의 역할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사그레도는 이 역할을 잘했을까? 썩 그러지는 않는다. 심플리치오가 얼마나 장황하게 말하는지 사회자인 사그레도조차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사그레도의 역할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그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모른다”고 말하는 것을 거리끼지 않는 것이다. 심플리치오의 말이 끝나면 사그레도는 살비아티에게 하소연한다. “살비아티, 나는 심플리치오가 뭐라고 하는지 하나도 못 알아듣겠어”라고 말이다. 이 “모른다”는 말로부터 이들의 대화는 시작된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음, 그러니까 아리스토텔레스 선생님 주장은 천체는 완벽하고 매끄럽고 지구는 거칠다는 거잖아요.” 간단히 정리했다. 그리고 칭찬이 이어진다. “와! 아리스토텔레스 선생님은 정말 대단하세요. 저는 망원경이 있잖아요. 망원경으로 보니까 금성도 매끈해 보이고 목성도 매끈해 보이더라고요. 그런데 그 옛날에 아리스토텔레스 선생님은 망원경도 없이 그걸 어떻게 아셨을까요? 우리는 그의 통찰력을 배워야 해요” 자기 선생님의 칭찬을 들은 심플리치오는 살비아티에 대한 호감 지수가 높아졌다. 이때 살짝 상처를 준다. “그런데 말입니다. 제가 망원경으로 달을 봤어요. 그런데 그림자가 있더라고요. 그림자가 있다는 뜻은 뭡니까? 높낮이가 있다는 뜻이잖아요. 저도 아리스토텔레스 선생님처럼 천체들은 매끈하다고 생각하지만 적어도 달만큼은 쟁반처럼 매끄러운 것은 아닌 것 같아요.” 자기 의견을 피력한 다음에는 다시 칭찬으로 마무리한다. “그래도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 선생님에게 배울 게 많아요. 그의 제자가 되고 싶어요”라고 말이다.
‘정리-칭찬-공격-칭찬’은 이후 과학자들의 대화법이 되었다. 정리는 상대방의 뜻을 오해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는 과정이고 칭찬은 그의 업적을 인정한다는 뜻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격할 요소가 있었고, 또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훌륭하니 같이 잘해 보자는 뜻이다.
이게 굳이 과학자의 대화법으로만 그쳐야 할까? 길거리에 널려 있는 플래카드에서 그리고 시사 토론 프로그램에서 격조 있는 표현과 대화를 보고 싶다. 조금만 더 명랑한 사회를 만들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