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보훈부가 광주시에 ‘정율성 기념사업’ 중단을 권고했다. 광주에서 태어나 중국에 귀화한 음악인 정율성이 과거 중국공산당에서 활동했으며 6·25전쟁 당시 중공군 일원으로 참전하는 등 대한민국이 기릴 만한 인물은 아니라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하지만 광주시는 권고를 거부하고 사업을 계속 추진키로 해 법적 분쟁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제기된다.
박민식 보훈부 장관은 11일 서울 용산구 서울지방보훈청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정율성은 6·25전쟁 당시 북한 인민군과 중공군의 사기를 북돋운 팔로군 행진곡과 조선인민군 행진곡 등 군가를 작곡했을 뿐 아니라 직접 적군으로 남침에 참여해 대한민국 체제를 위협하는 데 앞장선 인물”이라며 정율성 기념사업의 부당성을 지적했다. 이어 현재 추진 중인 정율성 공원뿐 아니라 이미 완료된 정율성로(도로명) 등에 대해서도 시정을 권고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광주시는 이날 입장문을 통해 정율성 기념사업에 위법한 사항이 없어 지속적으로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권고를 이행하지 않으면 시정명령을 즉각 발동하겠다”는 보훈부의 경고에 대해 광주시는 “정율성 기념사업은 보훈부 장관의 시정명령 대상이 되지 않는다”고 반박했다.
결국 이 사안은 법원 행정소송이나 헌법재판소 권한쟁의심판에 넘겨질 가능성이 커 보인다. 중앙정부가 지자체의 위법하지 않은 사무에 어느 정도 개입할 수 있는지가 쟁점이 될 전망이다. 박 장관은 기념사업 중단을 위해 모든 법률적 조치를 불사할 뜻을 내비쳤다.
◆“鄭, 남침에 직접 참여해 대한민국 체제 위협 앞장선 인물”
국가보훈부가 광주시 등에 ‘정율성 기념사업’에 대해 시정조치를 권고하며 중앙정부와 지방자치단체 간 갈등이 법적 공방으로 확대할 전망이다. 정율성은 일제강점기인 1914년 광주에서 태어나 중국으로 건너간 음악인으로 1939년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중국 인민해방군과 북한 인민군을 위한 군가 등을 작곡했으며 중국에 영구 귀화해 1976년 사망했다. 광주시는 중국인 관광객 유치 등을 목적으로 그의 생가와 가까운 거리를 ‘정율성로’로 지정했으며, 현재 정율성 기념공원을 조성 중이다.
11일 기자회견에서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은 “정율성은 6·25전쟁 당시 북한 인민군과 중공군의 사기를 북돋운 팔로군 행진곡과 조선인민군 행진곡 등 군가를 작곡했을 뿐만 아니라 직접 적군으로 남침에 참여해 대한민국 체제를 위협하는 데 앞장선 인물”이라고 말했다. 정율성이 과거 김일성한테 표창을 받은 점, 6·25전쟁 도중인 1951년 1·4후퇴로 중공군이 서울에 진입했을 때 점령군과 함께한 점 등을 언급하며 정율성 기념사업의 부당성을 지적했다. 다만 광주시는 기념사업을 중단할 뜻이 없음을 분명히 했다.
광주시 외에 전남 화순군에도 ‘정율성 고향집’ 전시관과 능주초등학교 내 ‘정율성 교실’ 등 기념시설이 있다. 정율성은 광주에서 태어났으나 어린 시절 화순으로 이사해 그곳에서 초등학교를 다닌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서재숙 능주초 교장은 이날 국회 교육위원회 국정감사에 증인으로 출석해 “화순교육청에 (정율성 교실의) 철거 조치를 취해 달라고 요구했으며, 행정 절차에 의해 철거해 주겠다는 답변을 받았다”고 답했다. 그러나 교육청 관할이 아닌 정율성 고향집과 관련해 화순군 측은 별다른 입장을 내놓지 않았다.
법률 전문가들은 소송으로 간다면 정율성 기념관을 위법한 자치 사무로 볼 것이냐가 핵심 쟁점이 될 것이라고 분석한다. 보훈부는 정율성 기념사업이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는 헌법 제1조와 국가보훈 기본법 제5조에 따른 대한민국 정체성을 부인하고 호국영령의 영예를 훼손하는 것이라는 입장이다. 반면 기념사업을 지지하는 측에서는 보훈부의 시정명령은 헌법상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라고 맞서는 형국이다.
지방자치법의 행정안전부 소관인데 보훈부 장관이 지방자치법에 따른 시정명령을 내리는 것이 적절하냐는 의견도 나왔다. 이에 박 장관은 “국가유공자 예우도 보훈부 장관 소관이고 유공자 폄훼에 대응하는 것도 보훈부 장관의 소관”이라고 답했다.
◆광주시 “장관 시정명령 대상 아냐” 항변… 시민들 “이념논쟁으로 확산되지 않아야”
정율성 기념사업을 중단하라는 국가보훈부의 권고를 광주시가 거부했다. 권고 불이행 때는 시정명령을 발동하겠다는 데 대해서도 시정명령 대상이 아니라고 맞받았다.
광주시는 보훈부의 중단 권고와 관련해 11일 입장문을 통해 정율성 기념사업에 위법한 사항이 없어 지속적으로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권고를 이행하지 않으면 시정명령을 즉각 발동하겠다는 정부 발표에 대해서도 광주시는 이 사업이 박민식 보훈부장관의 시정명령 대상이 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지방자치법 제188조에 따르면 자치사무는 위법한 경우에만 주무부 장관으로부터 시정명령을 받을 수 있다. 정율성 역사공원 조성사업은 광주시 자치사무이지만 위법한 사항이 전혀 없다는 게 광주시의 판단이다.
광주시 관계자는 “정율성 기념사업은 1988년 노태우 정부 때부터 35년간 지속돼 온 한중 우호교류 사업으로 위법한 사항이 없다”며 “정율성 생가터 복원사업인 역사공원 조성사업 완료 시기에 맞춰 시민들의 의견을 수렴해 종합적인 운영계획을 수립해 지혜롭게 추진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정율성 관련 시설을 두고 있는 광주 남구와 동구, 전남 화순군 등 기초단체들도 대책 마련에 분주하다. 정율성이 나고 자란 이들 지자체에서는 수년 전부터 기념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김병내 광주 남구청장은 이날 “보훈부로부터 공문이 오면 공식적인 입장을 밝히겠다”고 말을 아꼈다. 화순군은 전반적으로 사안을 검토해 결정하겠다는 입장이다.
정율성 역사공원 조성에 대해 광주시민들은 독보적인 음악가를 기리는 사업이 이념논쟁으로 확산되지 않아야 한다는 여론이 주류다. 한편으로는 정율성 거리에 설치된 정율성 흉상을 훼손하거나 광주시청 앞에서 정율성 기념사업 철회를 촉구하는 보수진영의 목소리도 높다.
앞서 박 장관의 정율성 기념사업 철회 요구 이후 광주시청 앞 광장에는 정율성 역사공원 조성 철회를 촉구하는 보수단체의 집회가 끊이지 않고 있다. 보훈단체 등은 지난달부터 날마다 시청 앞에서 “광주는 공산주의 영웅을 기리는 곳이 아니다”라고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보수단체가 이처럼 보수이념을 내세우면서 장기간 집단행동에 나선 것은 이례적이다.
지난 1일에는 보수계 개신교 전도사가 광주 남구 양림동 정율성 거리에 세워진 정율성 흉상을 훼손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 전도사는 “광주시에 정율성 기념사업 철회를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아 이런 행동(철거)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밝혔다.
보수진영의 집단행동이 계속되고 있지만 대부분 시민들은 이념논쟁이 하루빨리 종식되기를 바라고 있다. 이날 정율성 흉상이 철거된 현장을 지나던 시민 박모(63)씨는 “음악가 정율성은 이미 역사적인 검증이 끝나 30년 전부터 기념사업을 벌이고 있다”며 “뜬금없이 정율성의 행적을 문제삼는 것은 광주를 이념적으로 트집잡아 고립시키려는 의도가 아니겠느냐”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