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사해서 10년 넘게 구두 닦아 주시던 분이 언젠가부터 안 보이세요.”(서울 강남구 40대 직장인)
사무직 직장인이 많은 빌딩에는 매일 ‘구두닦이’라 불리던 구두수선공이 사무실을 돌며 구두를 수거해가거나, 아예 건물 지하에 구두수선대가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요즘엔 빌딩은 물론이고 거리에서도 구두수선대를 찾기가 쉽지 않다. 구두 수선공을 밀어낸 것은 로봇도, AI도 아닌 정장의 ‘변심’이다.
넥타이에 빳빳한 정장, 광택 나는 구두로 상징되던 직장인 패션이 일상복으로도 입을 수 있는 편안한 스타일의 ‘비즈니스 캐주얼’로 바뀌고 있다. 대기업 직원들도 넥타이 없이 셔츠에 편한 바지, 구두 대신 스니커즈를 신고 출근한다. 백화점에서는 신사복 매장 자리를 남성복 편집숍이 대체하고, ‘양복’이라 부르던 정장은 결혼식과 장례식 등 경조사 때만 갖춰 입는 추세다.
캐주얼 정장이 뉴노멀이 된 것은 격식보다는 편안함과 개성을 추구하는 2030세대와 나이보다 젊어보이고 싶은 중년 직장인의 욕구를 모두 수렴하기 때문이다.
이에 정통 남성복 브랜드들도 캐주얼 의류의 비중을 확대하고, 기존 신사복을 편안하면서도 우아한 실루엣으로 바꾸고 있다.
삼성물산 패션부문의 대표 남성복 브랜드 갤럭시(GALAXY)는 최근 론칭 40주년을 맞아 BI(Brand Identity)를 ‘테일러드 엘레강스(Tailored Elegance)’로 재정립했다. 삼성물산 패션부문 관계자는 “남성복의 캐주얼화 기조를 꾸준히 지속하면서 ‘고급화’와 (나이보다 어려보이는) ‘다운 에이징’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서 “올 초부터 협업한 글로벌 브랜드 ‘강혁’과 함께 남성복의 틀을 깨고 젠더리스(성별 구분 없는) 실루엣과 캐주얼라이징 등을 강조할 방침”이라고 설명했다.
지난해 ‘유러피안 컨템포러리’로 새 BI를 정한 로가디스(ROGATIS)도 올가을·겨울 실용 소비를 추구하는 젊은 층을 위한 모던한 감성의 셋업을 강화한다. 셋업은 재킷과 팬츠를 동일 소재로 구성한 세트 상품으로 편안한 착용감, 경량성이 강점이다. 재킷과 팬츠를 함께 입으면 캐주얼한 수트가 되고, 재킷과 팬츠를 따로 활용해 다양한 스타일링도 가능해 실용적이다.
코오롱Fnc의 남성복 브랜드 캠브리지 멤버스는 이미 캐주얼 비율이 60%로 정장(40%)보다 많다. 코오롱Fnc 관계자는 “남성 정장 시장이 축소되다가 엔데믹 이후 소비심리가 회복되면서 퀄리티 높은 상품 판매가 크게 늘고 있다”면서 “수요가 높은 캐주얼 상품에 수트 제작 노하우와 클래식의 가치를 담아 고급화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올가을 남성복 트렌드 키워드 역시 젊고 편안한 캐주얼 스타일 강세와 ‘올드 머니’(Old Money·집안 대대로 타고난 부자, 상류층) 열풍에 따라 ‘영 앤드 리치’(Young and Rich)로 귀결된다. 대부분의 남성복 브랜드들이 딱 떨어지는 정장보다는 부드럽고 고급스러운 소재감과 편안하면서도 우아한 실루엣을 강조하고 있다. 로고를 드러내지 않고 불필요한 디테일을 없앤 미니멀한 디자인에 캐시미어, 알파카 등의 소재로 고급스러움을 표현하는 올드머니룩이 여성복뿐 아니라 남성복에서도 두드러질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