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동맹의 산증인’ 김영규 한미연합사령부 공보관, 44년 만에 퇴임

제주도 출신으로 30세에 군 입대
카투사 차출로 주한미군과 인연
판문점 1000회 이상 드나들면서
대 언론 창구 역할 충실히 해 와

‘한반도 제일 남쪽에서 태어나 가장 북쪽에서 일한 사람.’

제주도에서 태어나 한미연합사령부 공보관으로 판문점을 1000회 이상 드나들었던 김영규(76) 공보관을 일컫는 말이다. 44년 동안 주한미군에서 대(對)언론 창구 역할을 해 온 김 공보관이 오는 31일 퇴임한다.

김영규 한미연합사령부 공보관이 헬기에 탑승한 모습. 본인 제공

한미연합사는 20일 경기 평택 서부문화예술회관에서 열리는 한·미동맹 70주년 기념 음악회를 계기로 김 공보관에게 한·미동맹에 기여한 공로로 감사패를 전달할 예정이라고 18일 밝혔다. 김 공보관은 이날 세계일보와의 통화에서 “주한미군에서 이렇게 오래 근무하게 될 줄 몰랐다”며 “한자리에서 40년 이상 일을 했다는 것이 가장 뿌듯하다”고 소감을 밝혔다.



연세대(67학번)에서 역사학을 전공한 그는 30세이던 1976년 비교적 늦은 나이로 군에 입대했다. 카투사(주한미군에 배속된 한국군 병사)로 차출되면서 주한미군과의 인연이 시작됐다. 그는 동두천에 있는 미 2사단 공보실에 배속돼 2사단 기관지 ‘인디언헤드’ 기자로 근무했다. 김 공보관이 입대한 그해에 일어난 북한군의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당시 그는 미 2사단 대원들이 북한군과 대치하면서 판문점의 미루나무를 제거하는 작전을 지켜보고 기록으로 남겼다.

1979년 전역한 그는 민간인 신분이 됨과 동시에 미 2사단 공보실 정식 직원으로 채용됐다. 1985년에는 주한미군 공보실로 자리를 옮겼고 이후 주한미군사령부와 한미연합사령부, 유엔군사령부의 공보관을 거치며 한국군과 미군의 가교 역할을 충실히 해 왔다. 특히 취재 지원을 위해 판문점을 1000회 이상 드나들며 한국의 내·외신 기자들은 물론 북한 기자들과도 자주 소통했다.

김 공보관은 주한미군이 한국 사회에 녹아들 수 있게끔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고 했다. 그는 “근무하는 동안 주한미군의 역할이 많이 달라졌다”며 “과거에는 동맹을 주도하는 역할이었다면 이제는 서포트(지원)하는 역할이 됐다”고 회상했다. 이어 “미래에는 (한·미가) 동반자적인 관계로 발전할 것”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