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의 주요 연구개발(R&D) 분야 사업에 투입하는 내년도 예산을 줄이려는 정부 기조에 따라 농촌진흥청 R&D 사업 예산도 20.5%가량 삭감됐다. 특히 고유 기관사업 이외 지역 경제에 영향을 미치는 공동 연구사업은 41.6% 줄였고 ‘우수 치유농업시설 인증제 운영’ 등 일부 사업은 한 푼도 배정하지 않았다. 윤석열 정부가 사실상 농업을 포기한 게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농진청 내년 R&D 사업 예산 20.5% 삭감 “농업 홀대”
국회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 소속 더불어민주당 이원택 의원(전북 김제시·부안군)이 18일 농진청으로부터 제출받은 2023년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기획재정부가 예산심사를 통해 재편성한 내년도 R&D 사업 예산은 7174억원으로 올해 9022억원보다 20.5%(1848억원) 삭감됐다. 이는 국가 R&D 예산 평균 삭감률(16.6%)보다 3.9%포인트 높은 수준이다.
이번 농진청 R&D 예산 삭감은 사업의 시급성이나 적절성을 면밀히 따진 게 아니라 투자 우선순위 조정과 과제 단가 조정, 시설·장비비 삭감 등 묻지마식으로 진행한 것으로 분석된다는 게 김 의원의 주장이다.
농진청 R&D 예산 삭감은 지역농업과 반려동물, 탄소저감, 농업 신동력 예산 등 거의 모든 농업 분야에 걸쳐 이뤄진 것으로 나타났다. 농진청 R&D 사업 중 유일한 지역농업 R&D 사업인 ‘지역 농업 연구기반 및 전략작물 육성사업’의 경우 사업비와 과제가 각각 79%, 65% 삭감돼 지역 농업 연구를 포기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다.
예산 삭감은 지역경제에 영향을 주는 공동 연구 사업에서도 예외는 아니어서 41.6% 감액했다. 이는 협력기관 이외 대학교수, 대학원생, 소상공인 등에도 악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이원택 의원은 “농진청 R&D 사업의 시급성·적절성 등을 따지지 않고 묻지마 식으로 일괄 삭감한 것은 윤석열정부의 농업 홀대, 농민 무시의 농정을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고 꼬집었다.
◆치유농업 인증 시작부터 좌초 위기…농림위성 분석장비도 차질
지난 5월 국회를 통과한 ‘치유농업 연구개발 및 육성에 관한 법률’에 따라 내년 6월 시행을 앞둔 ‘우수 치유농업 시설인증제’도 농진청이 요구한 내년 예산 5억원을 기획재정부가 예산 심의에서 전액 삭감해 시작부터 좌초될 위기에 놓였다.
치유 농장은 최근 농업의 체험을 통해 심신을 안정시키고 삶의 활력을 되찾는 농업 친화적 사업으로 미래 농업 소득 증대와도 연관이 있다.
이원택 의원은 “농진청 R&D 사업 중 유일한 지역농업 R&D 사업비를 대폭 삭감한 것은 윤석열정부의 지역 농업을 바라보는 바로미터”라며 “이번 국정감사와 국회 예산 심의를 통해 대한민국 농업의 미래라고 할 수 있는 농업 R&D 예산 복원에 주력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농진청 예산 삭감은 ‘농림위성’ 사업에도 큰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정부는 산림 재해를 상시 감시하고 산림·농경지를 지속적으로 모니터링 하기 위해 ‘농림위성’을 2025년 2월까지 발사할 계획이다. 이를 위한 총사업비는 1161억원이다 .
하지만 ‘농림위성’ 발사 이후 위성에서 보내온 영상자료 등을 활용할 장비와 기술이 준비되지 못해 무용지물이 될 것이라는 지적이다.
농진청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농업위성정보활용센터 구축사업’으로 편성한 예산은 54억원으로 당초 부처에서 요구한 83억원보다 33%(29억원) 삭감돼 사업에 큰 차질이 예상된다. 농업위성정보활용센터 구축 사업은 농림위성에서 송출한 사진 등을 농림 목적으로 가공하기 위한 장비와 체계를 개발하는 것이다.
농림위성에서 보내온 영상 자료들을 제대로 분석하기 위해서는 위성을 발사하기 6개월 전인 내년 8월까지는 모든 준비가 마쳐야 하지만, 이번 예산 삭감으로 차질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이원택 의원은 “1000억원이 넘는 농림위성을 우주에 띄워놓고 정작 영상을 분석할 장비가 개발이 안 되면 무용지물이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 R&D 연구과제 책임자 ‘툭하면 교체’…“연구실적 저하 불러”
농진청이 R&D 사업 관련 연구과제 책임자들을 빈번히 교체해 전문성과 효율성 저하를 우려하는 지적도 나왔다.
국회 농해수위 소속 더불어민주당 소병훈 위원장(경기 광주시갑)이 농진청으로부터 제출받은 ‘연구책임자 교체 현황’에 따르면 2019년부터 올해 9월까지 R&D 사업 연구과제 책임자 교체는 무려 1667건이나 됐다.
농업 분야 연구개발 책임자 교체는 2019년 303건, 2020년 328건이었다. 이어 2021년에는 306건으로 소폭 줄었다가 지난해는 375건으로 큰 폭 증가했고 올해 들어서도 지난달까지 총 355건의 연구책임자가 교체가 이뤄졌다. 이는 지난 1년간 연구책임자 교체 건수에 육박한다.
연구개발 책임자 교체 사유로는 개인신상과 관련 없는 소속기관 이동과 업무 조정, 승진 등과 같은 인사 발령이 1516건(91%)으로 대부분을 차지했다. 반면 불가피한 퇴직이나 휴직 등은 전체의 9%에 해당하는 151건에 불과하다.
교체 횟수도 문제로 지적됐다. 최근 2년간(2022~2023년 9월) 158개 연구과제에서 2번 이상 책임자가 교체된 것으로 나타났다. 2번 교체는 119건, 3번 교체는 28건, 4번 교체는 9건이었다. 이 중 ‘수출 품목별 연중 수출 기술 개발 및 시범 수출 실증’과 ‘농산물우수관리(GAP) 연계 항생제 내성 최소화 모델 개발’ 연구과제는 5번이나 연구책임자가 교체됐다.
소병훈 위원장은 “농촌진흥청 R&D 사업 내년 예산이 대폭 삭감된 가운데 연구책임자들의 잦은 인사이동마저 지속되면 연구 실적이 더욱 저하될 것”이라며 “농진청은 R&D 사업 특성을 반영해 연구 질적 저하가 이뤄지지 않도록 하고 정부는 농업의 미래를 대비할 수 있도록 아낌없이 지원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